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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칼럼

강해 이사야 1장 강해-1- (김성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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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작성일 19-05-11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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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Book of Isaiah

제자신학원 김 성 립 편저

사무총장-김성립목사.jpg지저스타임즈 신문과 JTNTV에서는 김성립 교수의 이사야 연구를 연재 하게 되었음을 감사드리면서 많은 구독과 기도를 부탁합니다.

 

1 이사야의 생애

 이사야서의 내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사야의 생애는 왕하 18:13-20:21에 의해서 보충되는데, 36-39장은 왕하의 이야기와 같은 내용이다. 이사야는 B.C. 760년경 예루살렘에서 아모스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여기서 언급되는 아모스는 선지자 아모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때는 웃시아 왕이 죽던 해(참조, 6:1; B.C. 742)이며, 그는 여선지자(참조, 8:3)와 결혼하여서 두 아들(스알야숩, 마헬살랄하스바스)을 두었다. 그의 사역은 유다의 세 왕, 즉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통치하에서 약 40여 년 동안 계속된다.

 

 이사야 선지자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략하러 왔을 때(B.C. 701)인데, 이때 히스기야와 그의 신하들은 이사야에게 기도를 호소했었다. 이스라엘의 전통적 전설에 의하면 므낫세 왕 때에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참조, 11:37; 왕하 21:16).

 

 1) 이사야의 소명

 본문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B.C. 742)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참조, 6:1)라고 말하면서 그가 본 환상을 중심으로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유다의 출중한 일꾼인 웃시야 왕의 죽음은 유다와 이사야에게 큰 충격이었다. 유다의 혁혁한 과거사는 이제 다 지나가고 나라의 장래는 암담하였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과 불안한 마음으로 사로잡혀 있는 이사야는 발걸음을 성전으로 옮기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진정한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보았는데,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 하도다’(참조, 6:3)라고 헌화하며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이때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존전에서 이사야는 당시에 팽배하던 의식(형식)적인 종교의 무익함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니며, 완전히 무기력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참조, 6:5)고 외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손에 의해서 죄 사함을 받은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졌으며, 그의 마음은 새로운 소명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였으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이 새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이제 이사야의 마음 가운데 두 가지 확실한 인식이 생겼는데,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 통치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비로소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참조, 6:8)라고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참조, 6:8)라고 대답한다. 그는 하나님의 지엄하신 뜻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초기 사역(B.C. 742-734)

이사야의 성전 체험을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그는 성전의 일과 가까운 신분에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처럼 이사야를 제사장, 또는 성전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상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소명 받은 직후 이사야의 초기 사역은 비교적 당대의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악을 규탄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참조, 6:9-10). 그는 분명히 자기 백성의 완악성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가 사람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고 공적인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B.C. 734년 시리아-에브라임 군대가 유다를 침공한 시기부터이다. 그는 앗수르의 보호를 의지하려던 아하스의 계획에 정면으로 반대했는데, 그것은 이러한 정치적 동맹이 반드시 종교적 혼합주의로 치닫게 되고 정치적인 자유와 독립을 상실케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참조, 왕하 16:10-18). 메시아 탄생을 예언한 것은 이때였는데, 이 예언이 갖는 의미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길이며, 불신앙이 환난을 자초한다는 것을 강조함이다. 따라서 이사야의 근본적인 의도는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전하려는 종교적인 데 있었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7:9)’

 

 3) 공적 생활에서의 은퇴 시기(B.C. 734-715)

 이사야는 아하스 왕이 앗수르와 동맹을 체결한 후 이제 자기는 침묵을 지킬 것이며 여호와를 기다리겠다고 선언했다(참조, 8:16-18). 적어도 이러한 이사야의 태도는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아들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여호와의 징조와 예표가 도리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B.C. 734년에서부터 아하스가 죽은 B.C. 715년 사이에 이사야는 어떠한 공적 발언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4) 중반기 사역 (B.C. 715-705)

 히스기야 왕이 아하스를 계승하였을 때 이사야는 다시 자유로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히스기야는 자기 아버지의 외교 정책을 변화시킬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고,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의 외교 정책이 바뀌기를 기다린 사람이었다. 711년에 앗수르의 다르단이 블레셋의 요새 아스돗을 점령하자 이사야는 애굽과 구스(에티오피아)의 당할 운명을 예고하는 표적과 징표로서 맨발과 알몸으로 다니라는 명령을 받았다(참조, 18; 19:1-15). 그는 3년간을 그렇게 다녔는데, 그것은 히스기야를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사야는 점차로 증가되어 가는 앗수르의 포악성을 유다를 위한 하나님의 연단으로, 앗수르를 하나님의 채찍으로 본 것이 분명하다(참조, 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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