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칼럼 靑松박명윤칼럼 (1124)... 왕사남(王과 사는 男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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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6-03-12 17:10본문
‘단종(端宗) 앓이’ 신드롬

◀박명윤(보건학박사,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The Jesus Times 논설고문)
오랜만에 달콤한 ‘영화관 팝콘(popcorn)’을 즐긴 후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는 아내가 추천한 <왕과 사는 남자>로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1층에 위치한 ‘메가박스(Megabox)’ 8관에서 3월 9일 오후 5시15분부터 약 2시간 관람했다. 관람료는 성인은 1만5천원이지만, 경로우대로 우리부부는 16,000원(2인)을 지불했다. 이 영화는 조선 6대 왕 단종(端宗)의 짧은 생애(16세, 1441.8.18.-1457.11.16)를 그린 작품으로 개봉 31일째였던 지난 3월 6일 1000만 관객을 기록했다.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는 강원도 영월 청령포(淸泠浦)를 배경으로 한다. 이 영화는 조선 단종 시기의 팩션(faction) 사극(史劇)으로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해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다. 폐위된 단종 이홍위(박지훈 분)가 강원도 영월의 유배지에서 촌장 엄흥도(유해진 분)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는 내용을 그렸다.
영화는 육지 속의 섬과 같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 단종이 자유롭게 그곳을 빠져나와 백성과 만나 교감하는 데서부터 일종의 판타지(fantasy)가 된다. 실제로는 단종은 백성과 접촉할 수 없었지만, 영화는 임금과 백성이 서로를 지켜 주며 폭압적인 권력에 맞서는 이상적인 리더십을 희구(希求)한다. 영화 관객은 백성과 호흡하고 부조리에 저항하는 리더십에 열광한다.
단종의 생애(生涯)는 교과서나 역사책 등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다. 단종 폐위(廢位)까지는 잘 알지만, 유배 이후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영화 ‘왕사남’은 단종을 기존과 다른 각도로 조명한다. 즉 궁중 암투의 나약한 희생양이 아닌, 유배지에서 민초(民草)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는 따뜻하지만 카리스마(charisma)가 있는 이홍위(단종)를 그렸다.
영화에서 세조가 된 수양대군(首陽大君)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유배지에서 폐위된 왕을 돕는 엄흥도로 대표되는 광천골 사람들의 모습이 비중 있게 그려진다. 그리고 백성에게 직접 글을 가르치는 이홍위 등 현 시대가 바라는 지도자의 모습을 투영해 내고 있다. 영화는 화려한 성공 신화보다 실패하더라도 옳은 일을 하는 작은 영웅에 공감하는 요즘 관객들의 정서와 맞닿아 신드롬(syndrome)급 반응이 나오고 있다.
‘왕사남’이 인기를 끌면서 전국에서 단종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를 직접 보려는 사람이 몰리고 있어 최근 방문객은 전년 대비 5배 이상 급증했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막혀 있으며 뒤쪽엔 높이 400m 절벽이 있어 ‘육지 속의 섬’이라고 불리며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다. 청령포를 둘러본 관광객들은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단종의 장릉(莊陵)을 방문한다. 1457년 16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 단종 관련 도서의 판매는 전년동기(2월4일-3월3일) 대비 약 80배 증가했다고 한다.
유배(流配) 형벌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죄인을 차마 사형에 처하지 못할 때 내린다. 양반 체면을 중시하는 조선에서는 양반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몸을 훼손하는 교수·참수(斬首)형은 내리지 않았다. 대신 사약(死藥)을 내렸다. 특히 지위가 높은 사대부나 왕족에게는 유배를 보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거나, 유배지에서 사약을 내렸다. 유배 형벌 중 가장 심한 것은 위리안치(圍籬安置)로 죄인이 유배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집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가뒀다.
조선왕계보(朝鮮王系譜)란 1392년 건국부터 1910년 대한제국 멸망까지 이어진 왕의 계승 순서를 의미한다. 조선은 총 27명의 왕(대한제국 황제 2명 포함)을 배출했다. 조선시대 역대 왕은 1. 태조, 2. 정종, 3. 태종, 4. 세종, 5. 문종, 6. 단종, 7. 세조, 8. 예종, 9. 성종, 10. 연산군, 11. 중종, 12. 인종, 13. 명종, 14. 선조, 15. 광해군, 16. 인조, 17. 효종, 18. 현종, 19. 숙종, 20. 경종, 21. 영조, 22. 정조, 23. 순조, 24. 헌종, 25. 철종, 26. 고종, 27. 순종 등으로 이어진다.
단종은 조선의 제6대 임금이며, 이름은 이홍위(李弘暐)이다. 제5대 임금 문종(文宗)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년) 8월 18일에 태어나서 1448년 4월 3일 세종(世宗)에 의해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었고, 문종 원년(1451년) 정월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을 받았다. 문종 2년(1452년) 5월 14일 문종이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별세하자, 5월 18일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국왕으로 즉위했다.
단종의 모후(母后)는 단종을 출산하다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후원해 줄 내명부(內命婦)의 어른은 없었다. 따라서 어린 국왕의 후원은 문종이 후사를 부탁한 대신들이 맡았다. 당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는 고명대신으로서 어린 임금을 보좌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한편 당시 종친(宗親)들의 위세가 대단하였다.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도 아직 살아 있었고 세종의 정실 자식인 여러 대군들은 한창 왕성한 활동을 펼칠 나이인 장년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유명하였는데, 그들은 단종의 숙부로서 정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단종 원년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자신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의정대신(議政大臣)인 황보인, 김종서 등이 결탁하여 모반(謀反)하려 한다는 것을 핑계로 군사를 동원하여 정변(政變)을 일으켰으며, 이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한다. 수양대군은 자신을 따르던 무인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켜 먼저 자신의 최대 정적인 좌의정 김종서를 죽이고 여러 대신들을 왕명으로 불러 처단하였다. 그리고 동생인 안평대군과 그 아들을 체포하여 강화도에 안치했다.
수양대군은 정변의 뒤처리가 마무리되자 단종의 혼례(婚禮)를 추진하였다. 당시는 문종의 상기가 끝나지 않아 혼례를 추진할 수 없는 시기였으나, 수양대군은 단종의 처지가 외롭고 약하여 국인(國人)이 모두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원한다는 논리로 혼례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풍저창 부사 송현수의 딸을 비(妃)로 맞아 들였다.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한 다음 단종의 측근 세력은 위축되었으며, 단종을 보위하던 내관(內官)들은 축출되었다. 한편, 왕실에서는 단종의 어린 시절 보육을 맡았던 혜빈(惠嬪) 양씨과 그의 아들인 한남군과 영풍군, 그리고 금성대군(錦城大君) 등이 단종을 보위하면서 수양대군과 대립하였다. 그러자 수양대군은 단종 3년 6월 이들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혐의를 씌워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단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고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세조 정권의 성립을 인정할 수 없는 유신(儒臣)들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모의를 추진하였다.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알려진 단종 복위 모의 사건은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集賢殿) 출신의 유생들과 성승, 유응부 등 고위 무관, 그리고 단종의 외숙부인 권자신과 같은 외척 세력이 연합하여 모의한 것이었다.
성삼문(成三問) 등의 상왕 복위 모의가 발각되자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심문 과정에서 성삼문은 단종이 복위 모의에 가담하였음을 밝혔다. 이에 대신들은 상왕에게 모의에 대한 책임을 물어 지방으로 내치자고 건의하였으나 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조 3년 6월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와 권완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발이 들어오자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조치를 단행했다.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에 거주하게 하였다. 단종은 영월 서강 청령포(淸泠浦)에 머물다가 수재를 입을 염려가 있어 객사(客舍) 동헌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는 금성대군 이유(李瑜)의 죽음을 들은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종 사후 시신(屍身)을 수습하는 이가 없어 방치되어 있다가 영월의 아전 엄흥도가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시신을 거둬 자기 선산에 묻었다고 한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지만 단종의 왕비(王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는 단종이 죽고도 65년을 더 살다가 중종 16년 향년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위치한 사릉(思陵)이다.
세조의 후손들이 조선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서 단종은 국가의 위기를 불어온 어리석은 왕으로 폄하되었다. 신분도 왕이 아닌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사림파(士林派)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면서 세조 정권 성립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단종의 죽음을 억울한 것이라고 평가하여 단종 세력의 복권을 추진하였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그리고 숙종 24년(1698)에는 강봉(降封)되었던 단종을 다시 왕으로 추복(追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단종 대에 반역자로 몰려 죽음을 당했거나 처벌 받았던 사람들을 복권하고 추숭(追崇)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이에 정조는 단종의 능인 영월(寧越) 장릉(莊陵, Jangneung Royal Tomb)에 배식단(정단과 별단)을 세우고 이른바 단종 충신들을 봉안하였다.
靑松 朴明潤(서울대학교 保健學博士會 고문, 대한보건협회 자문위원, The Jesus Times 논설고문) <청송 박명윤 칼럼(1124) 2026.3.12.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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