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제3장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사도영성 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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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작성일 19-05-29 21:50본문
하나님의 생명력을 깨닳은 사도들 순교를 각오한 사역
사도영성 아카데미 원장 홍항표(요한) 목사
지난번에 이어서...
더욱이나 신을 믿는 신자들의 경우에서도, 바른 신학의 정립이 없이 자신의 개인의 경험과 성향에 따라 신비로운 현상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오늘날 여러 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영성운동들에서 볼 수 있듯이, 바른 신학적 통찰이 없는 사람들의 이목과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도되는 다양한 운동들은 오히려 영성적 삶이 아닌 또 하나의 환원주의에 물들이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빈야드 운동이나, 성령 신유 집회라든지,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시도되는 찬양집회들이 바로 이런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영성운동의 토대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실재인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과,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인간의 지위와 존재 목적, 타락으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 등의 확고한 신학적 토대 없이 시도되는 모든 영성운동은 시대에 따라 변동되는 운동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확고한 신학적 토대 위에서 영성적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필자는‘사도영성 신학’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성경의 신학적 통찰을 통해 성도들의 삶을 체계화하는 사도영성 신학을 밝혀보고자 한다.
1. 사도영성 신학의 역사
영성 신학은 중세 스콜라 시대에 들어서면서 신학과 영성이 뚜렷하게 분리되는 현상을 보였다. 스콜라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기독교 경험으로서의 영성의 주제를 그의역작인‘신학대전’(SummaTheologiae)에서‘윤리신학’(moral theology)이라는 분야에 예속시킴으로 비로소 영성이 신학의 한 영역으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도 기독교 신학을 이론과 실천적인 영역으로 더욱 뚜렷하게 나누어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론적인 영역의 신학을‘교리신학’(dogmatic theology)이라 했고, 실천적인 영역을 ‘윤리신학’(moral theology)이라 했다. 개신교에서는 전자를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라고 불렀고, 후자를 ‘기독교 윤리’(Christian ethics)라고 불렀다.
‘교리신학’이나 ‘조직신학’은 고백적인 서술, 즉 ‘무엇을 믿느냐?’를 다루는 영역이고, ‘윤리신학’이나 ‘기독교 윤리’는 교리적인 고백의 의미를 따라서 ‘어떻게 사느냐?’를 다루는 영역이다. 여기서 ‘기독교 영성’의 자리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기독교 윤리’에 더 적합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는‘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잘 되었는가? 잘못 되었다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라는 문자 그대로 윤리적인 질문에 국한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윤리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독교적인 삶, 즉 영적인 체험 등을 기독교 윤리에서 다루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17세기 로마 카톨릭에서는 윤리신학을‘수덕신학’(ascetical theology)과‘신비신학’(mystical theology)으로 더욱 세분된다.‘수덕신학’이란‘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다루는 것이라면, ‘신비신학’은‘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다룬다.‘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은 서로가 서로의 길을 열어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영성’이란 점차적으로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말로 발전되어 갔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영성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그 경험으로 이르는 모든 과정을 포함하여 ‘영성’(spirituality)이라 했고, 방법론을 도입하거나 여타 다른 영역의 학문을 도입하여 영성적인 체험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를 ‘영성신학’(spirituality theology)라 했다.
다음에 연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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