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11월호 소강석 목사의 ‘행복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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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작성일 18-11-06 05:40본문
샘터11월호 소강석 목사의 ‘행복이정표’
『돌아갈 수 없기에 더 그리운 시절』
한국인이라면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시는 한국인의 무의식에 잠복해 있는 문화적 심성 구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부르면 어느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고 한없이 어려지는 듯하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뜰에는 반짝이는 금 모랫빛 /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나 역시 그 시를 생각할 때마다 한 소녀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때 그 아이의 아버지는 고향의 유지셨다. 소녀는 도시 아이처럼 좋은 옷을 입었으며 얼굴도 하얗고 예뻤다. 한번은 반에서 노래 경연을 했는데 그 노래 제목이 <엄마야 누나야>였다. 그때 내가 제일 잘 불렀다고 박수를 받았지만 정작 운동장에 모여 있는 전교생 앞에서 반 대표로 노래를 부른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소녀였다. 그 아이 엄마의 치맛바람 때문이었다.
나는 몹시 섭섭하였지만, 소녀가 예쁘고 좋아서였는지 박수를 쳐주었다. 지금도 이 노래만 부르면 그때 그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철새들이 수십 번을 날아오고 날아갔다. 그래도 그때의 일은 날아간 철새처럼 잊힌 듯하지만 다시 날아온 철새처럼 이따금 추억의 상념이 되어 떠오른다.
그러다가 한번은 고향으로 집회를 가서 우연히 그 소녀의 연락처를 받았다. 그 아이는 지방 어느 도시에 살고 있었다. 얼마 뒤 마침 집회를 위해 그 지역에 방문할 일이 생겼다. 여기까지 온 김에 친구를 만나고 싶어 전화를 해보았다. “나 초등학교 친구 강석인데 나 기억하고 있니? 그때 네가 내 대신 나가서 노래 불렀잖아, 기억 나? 마침 이 지역에 집회가 있어서 연락해봤어. 너도 집회에 참석하지 않을래? 아니면 만나서 같이 식사해도 좋고.”
그랬더니 자기는 이미 TV 화면으로 나를 많이 보고 있다고 하면서 자꾸 피하는 것이다. “아니 나 혼자 오는 것도 아니고 우리 장로님들도 함께 왔어. 그리고 네 남편도 같이 나와. 우리도 몇 년 있으며 회갑인데 더 늙기 전에 얼굴 한번 보자!”
나중에 다른 친구로부터 그 친구가 인생의 많은 고난과 풍파를 거치면서 현재의 삶이 변변치 않아서 피했던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이야기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구절이 더 가슴 저리게 다가왔다. 안도현의 시 구절처럼 곧 가을 단풍은 가을엽서처럼 낮은 곳으로 떨어질 텐데, 유년의 소중한 추억들이 내 머릿속에 단풍처럼 물들어가는 듯하다.
이 시대 최고의 인문학자인 이어령 교수는 이 시에 나오는 강변이 남성적 공간이 아니라, 여성적 공간이라 평했다. 따라서 소월 시인은 지금 어린아이가 되어서 여성적 공간인 강변에서 엄마와 누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표현은 ‘토포필리아(topophilia)’적 표현이다. 토포필리아라는 말은 ‘특정 장소에 대한 정서적 유대’라는 말이다. 그래서 소월은 여성적 공간인 따뜻한 강변, 즉 자연과 생명이 흘러넘치는 강변이라는 공간에서 포근한 삶을 느껴보고 누려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빠와 형’은 남성적 공간이요 비자연의 공간이며 전쟁과 경쟁이 치열한 문명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는 그런 전쟁과 경쟁의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자연과 생명의 영원한 공간으로 이동해서 살아보고 싶다고 노래를 한 것이다. 소월은 갔지만 소월의 시심이 내 안에서 다시 엄마야, 누나야를 부르게 한다.
아, 금모래빛 빛나던 유년의 강변, 갈잎의 노래가 들리던 그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내 어린 시절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린 다시 그 강변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마, 우린 영원히 그 강변으로 다시 돌아가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돌아갈 수 없기에 더 그립고 아련한 유년의 강물은 언제까지나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흐르고 또 흘러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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