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설교관(說敎觀)-5- > 신학

본문 바로가기

신학

문화 칼빈의 설교관(說敎觀)-5-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작성일 18-10-10 13:40

본문

칼빈의 설교관(說敎觀)-5- 

 예수패밀리쳐치 서명범 목사

14. 교육부부장 서명범목사(공덕교회).jpg 우리가 하나님과 전쟁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왜곡(歪曲)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꾸짖어야 할 내가 악을 허용하고자 한다면 뭐가 되겠습니까? 그같은 일이 정당하게 되거나 또는 우리가 이런 것을 구실로 이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무리 이것 저것 갖다 붙여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양심(良心)은 우리를 매우 꾸짖게 됩니다“.

 

또한, 그는 사도행전 2018절 이하를 설교하면서 “...나는 이처럼 내가 내 양심에 따라 해야 할 바를 수행하도록 사람들이 허락지 않든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내게는 전혀 합법적이지 않는 일을 하라고 사람들이 날 강요하든 간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 이외의 것을 넘어서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자유로이 설교하고 또 여러분에게 봉사할 수 있는 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이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는 그의 욥기 33:1-7 설교에서 말씀 사역자와 청중에 대해 이렇게 설교했다. “...하나님을 따라 곧게 말하고 있는 사람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에 시선을 돌려서는 안됩니다. 만일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거나 칭찬을 받는 일에 좌우된다면 우리에게 선한 원리가 하나도 없을 것이고, 결국 고통 밖에는 당할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문제가 될 때에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만일 피조물에 불과한 인생들을 보고서 두려워져 마땅히 말해야 할 바대로 자유롭게 말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처사가 아닐까요? 

 

어떤 세상 군왕이 한 사람을 파송하였는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비웃고 그 임무를 마땅히 행하지 못하게 해도 가만히 있으며, 자기가 위임 맡은 메시지를 감히 전하지 않고 있다면, 그 겁장이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먼지에 불과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당신을 섬기도록 받아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영예로운 임무를 주시고, 모든 권위와 경외심을 옷입혀 그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무섭게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왜곡시켰다 합시다.

아니면 그 하나님의 진리가 본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위를 더 이상 갖지 못하게 그 진리를 전한다고 합시다. 그만큼 하나님의 질책(叱責)을 받을만한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목에서 두 가지의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목회자로 가르침의 직무를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은 결연한 자세를 가지고 예레미야가 말하듯이 어느 것에도 관여치 말고 싸우는 날의 장수(將帥)처럼 담대(膽大)해야 합니다(참조,예레미야 15:20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왜냐하면 세상에는 말할 수 없이 강퍅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망각하여 자기들을 창조했고 조성하신 하나님께 복종할 수 없는 때, 도저히 남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관성을 지니고 우리의 의무를 감당할 때도, 적수를 만나거나 불쾌함을 맛보게 될 것임을 당연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적과 불쾌함을 만나더라도 결코 믿음을 굽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목회자로 장립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그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또한 여기서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인 교훈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우리 죄를 책망하는 것을 듣고 오만한 자세를 취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노를 격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등을 가볍게 문질러 주는 것을 가지고 노를 격발할 정도로 분개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해야 마땅한 것처럼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거나 주제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 속에 어떤 선한 기질이 있는 체 하면서 우리를 아껴 달라고 요구해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전파된 것은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들을 내맡기게 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누구나 다 그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왕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마땅히 하나님의 진리가 전파될 때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압시다. 왜 그렇습니까? 왕들이라 할지라도 그 점을 의식해야만 함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설교하는 그 사람이 어떠한 주인, 어떠한 상전으로부터 보냄 받았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복종을 받아야 하고 온 인류를 지배하는 주권적인 통치권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까불댄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더러 본성(本性)을 바꾸시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낮추라고 덤벼드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마귀적인 무모함이 아닙니까? 그러니 모든 겸손(謙遜)과 겸비(謙卑)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의 순종이 이러한 방면에서 시험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응당 그래야 하듯이 어느 누구도 그러한 시금석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모든 허물이 곧바로 드러나고야 맙니다.

 

또한 미가서 강해(講解)(미가서 39-10)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직무는 사람들의 죄를 밝히되, 그로 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겸비하게 하고 자기 자신들에 대하여 불쾌한 마음을 가지게 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게 도리 것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입니다.....말씀의 칼이 우리의 심장 깊은 곳을 찌르고 우리의 악한 충동(衝動)을 다 베어내 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유익(有益)한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달콤하고 안위(安慰)에 찬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얼마나 복된 죽음입니까! 도망하려고 애를 쓰는 자들은 자기들의 정죄(定罪)만을 증가(增加)시키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멸()하기까지 우리를 찌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칼빈은 설교자의 설교(說敎)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傳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 자신은 그 말씀을 변개(變改)할 수 없고 청중(聽衆)은 그 말씀을 거부(拒否)해선 않된다고 강조했다.

 

III. 나가는 말

 칼빈의 설교는 성경의 충실한 해설과 적용이었다. 그의 설교는 설교자로서의 자기 인식과 설교에 대한 성경적 확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굳게 믿고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강해설교(講解說敎)에 집중했다. 이 사역에 충실하기 위해 그는 성경의 적확(適確)한 뜻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칼빈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10:16)라는 말씀을 목사의 말씀 사역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입이며 그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고한 신앙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또한 설교란, 성경이 충실히 그 본래의 의미를 찾아 설명(說明) 되어지고 가르쳐 질때, 즉 강해(講解)될 때 하나님의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성경 강설(講說, 강해(講解))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다.

 

그는 말씀의 사역자” “말씀의 종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의 생애를 말씀 사역에 헌신했다. 설교자의 자기 인식 없이는 설교 사역의 변혁도 없는 것이다. 설교자의 자기 인식과 설교에 대한 개혁자의 인식을 재발견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설교사역을 새롭게 변혁시킬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불행히도 설교 사역에 대한 회의와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설교에 대한 확신이 사라져 가고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표자요 하나님의 입이라는 설교자의 자기 인식이 없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10:16)라는 말씀을 믿으려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 교인(敎人)들의 취미(趣味)와 즐거움에 영합(迎合)하여 자기 인기(人氣)를 위해 온전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설교자들은 이런 칼빈의 음성을 들어 회개(悔改)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의 설교를 판단(判斷)이나 하려하고 경청(傾聽)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거절하는 자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듣기 보다는 자기 귀를 즐겁게 하려는 자들이 많은 마지막 시대(딤후 4:3-4)일수록 개혁자 칼빈의 설교(說敎)에 대한 확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 개혁자 칼빈의 설교관(說敎觀)이 오늘 우리들의 사역에 도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해 동안 제네바에서 칼빈의 동료로 활동했던 니콜라스 데 걀라르(Nicolas des Gallars)의 말을 끝으로 이 논의를 마치고자 한다. 니콜라스 데 걀라르(Nicolas des Gallars)는 칼빈의 목회활동을 다음 말로 요약했다.

 

얼마나 많은 일과, 얼마나 많은 철야와 얼마나 많은 염려를 그는 감당했던가, 얼마나 날카롭게 얼마나 민감하게 그는 위험을 예견했던가, 얼마나 열심히 그는 이 위험들을 피했던가, 얼마나 신실하고 지성적으로 모든 이에게 관심을 가졌던가, 어떤 친절과 감사로 자기에게 말 걸어오는 자들을 영접했던가, 얼마나 신속히 그리고 솔직히 그는 중대한 질문을 자기에게 해 오는 자들에게 대답했던가, 사람들이 자기 앞에 내 놓는 난관과 문제들을 사적이건 공적이건 얼마나 현명하게 해결하였던가,

 

 얼마나 부드럽게 그는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낙담하며 용기를 잃은 자를 부추겼던가, 어떤 열심으로 그는 교만한 자들과 고집불통들을 쓰러드렸던가, 그가 불행을 참아 낸 것은 얼마나 큰 영혼의 위대함인가, 그가 번영 속에서 어떤 절제로 행동했던가, 얼마나 능란하게 또 도약적으로 그가 참되고 신실한 종의 모든 의무에 전념했던가, 나는 이 모든 것을 분명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사이트 내 전체검색
  • 주간 인기기사
    레위기 강해(2-2) 레 1:3~6절 하나님…
    한국교회총연합 2024년 성탄절 메세지
    靑松 건강칼럼(978)... 치매(癡呆) 원인…
    곽에스더 목사 목양칼럼-38- 오늘은 참참참…
    리버티대학 동문회, 한국에서 연말 송년회 행사…
    지타즈 / 언부협 2025년 신년하례 감사예배…
    군산성시화운동본부, 송년모임 갖고
    초기 교회의 성경과 초기 교회 신앙으로 돌아갑…
    키 작은 행복
    <2024년 성탄절을 맞으며> 불의하고 불법한…

그누보드5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청소년 보호정책(대표 겸 발행인 : 정기남)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지양로 176번길 32, (대운빌라 102호) 대표전화 032)672-3031
등록번호 : 경기, 아50924 | 특수주간신문 발행인/편집인 : 정기남 | 등록일/발행일 : 2007년 10월 17일
사업자번호 : 101-08-94879 | 후원계좌: 우체국 310029-02-152769 (정기남)
Copyright ⓒ 2007 크리스찬포토저널(CPJ), Allrights reserved. E-mail:cpj5037@daum.net
편집인 : H.P 010-5468-6574 / 032-672-3031(팩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