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칼빈의 설교관(說敎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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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작성일 18-07-15 07:51본문
칼빈의 설교관(說敎觀) 3
예수패밀리쳐치 담임목사 서명범
2) 성례전(聖禮典)의 신비(神祕)와 동일(同一)한 신비로운 설교(說敎)
그러나 칼빈은 설교자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칼빈은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동안 성령께서 계속 감동할 여지가 있어야 함을 확고히 믿고 있었다. 칼빈은 (딤후 1장 9,10절)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오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하거나 역사함이 없이는 또는 믿음으로 오지 않는다면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다.
그러므로 청중의 가슴 속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조명과 믿음의 수반없이는 말씀의 성실한 설교일찌라도 청중들에게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라”는 성령(聖靈)의 내적(內的)사역(事役)을 강조하는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설교는 성령의 권능으로써만 능력을 부여 받을 수 있을 뿐이며, 외적인 말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효력도 청중에게 미칠수 없다” 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능력이 말씀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주이시고 구주이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설교자는 설교에 앞서 기도로써 준비하여 말씀을 전달하는 그 자신이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은 설교가 그 자체로서는 듣는 이들을 변화시킬 아무런 힘도 없음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성경은 회개의 은사도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이 없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회심의 역사, 구속과 영생의 기쁨이 죄인들의 영혼에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설교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그 말씀을 그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성령의 권능의 결과인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칼빈은 성령의 감동을 설교의 효력에 결정적 요인으로 말했다.
그러나 칼빈은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은 기록된 성경과 동등하다”고 주장한 루터와는 달랐다. 또한 쯔빙글리나 재침례파와 같이 설교를 단순히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로 보지도 않았다. 칼빈은 성경을 성령의 독특한 영감을 통해 기록된 형태로 주어진 하나님의 객관적 말씀으로 믿었다. 그리고 설교(說敎)는 기록된 말씀을 풀어 해석(解釋)하는 것으로써만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미가서 강해(講解) 중에서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그 교훈들이 성경에 일치하는 것인지를 조심하여 점검하여야 합니다.
성경을 강해(講解)하는 것이 아니라면 설교나 교리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을 첨가하면, 그것이 아무리 미세하고 의미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고 거짓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서들과 복음서들을 통해서 완전하고 철저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에 속한 것을 하나도 더 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자의 임무란, 우리가 하나님의 가르침 속에 더 깊게 뿌리내리도록 충분한 말씀 강해(講解)를 제시(提示)하는 것입니다. 모든 강론(講論)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제시될 때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계시는지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모든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꾸며 낸 것은 어느 것이든 더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설교자들은, 자기들이 고백하는 것이 자기 자신들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틀림없는 진리에서 나온 것인지를 확인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미3:5-8 (칼빈의 미가서 설교 중에서)
칼빈은 이렇게 객관적 계시로서의 기록된 성경(聖經)과 기록된 성경을 풀어 해석(解釋)하며 적용(適用)하는 설교(說敎)와는 구별(區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령께서 설교자와 청중들을 다 감동하실 때만이 설교가 구속적(救贖的)인 효과를 가진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객관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설교 할 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록된 말씀과 같은 권위로 임하고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례전에 관한 그의 교리와도 통하는 견해인 것이다.
즉 성례전에서 주님의 은총이 임하듯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이다. 성례전의 떡과 포도즙은 객관적 실체이다. 그것은 떡과 포도즙 그대로 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아무 효력이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주님이 약속하신 실재(예수님의 피와 살)를 먹게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에게 효력이 나타난다. 이와같이 설교자의 설교를 청중이 믿음으로 받을 때 성령의 역사에 의해 약속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이 말씀이 믿는 자의 속에서 역사한다는 것이다.(살전2:13). 설교는 기계적으로 효력을 발(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 효력을 발(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령의 감동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어떤 설교도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신비로운 감동하심의 역사로 말씀을 사용하실 때 그 설교는 효과적이 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성례에 참예하는 자들이 주님이 약속하신 살과 피를 먹음같이 믿음으로 설교자의 말씀 듣는 자가 주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은총을 받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례(聖禮)와 설교가 기록된 말씀에 의존해야 하나, 둘 다 성령의 은혜로운 임재로 채워질 때에만 실재적 은혜의 방편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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