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칼빈의 설교관(說敎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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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작성일 18-08-18 13:47본문
칼빈의 설교관(說敎觀) 4
예수패밀리쳐치 담임목사 서명범
지난호에 이어서
이것은 성례전에 관한 그의 교리와도 통하는 견해인 것이다. 즉 성례전에서 주님의 은총이 임하듯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이다. 성례전의 떡과 포도즙은 객관적 실체이다. 그것은 떡과 포도즙 그대로 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아무 효력이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주님이 약속하신 실재(예수님의 피와 살)를 먹게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에게 효력이 나타난다. 이와같이 설교자의 설교를 청중이 믿음으로 받을 때 성령의 역사에 의해 약속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이 말씀이 믿는 자의 속에서 역사한다는 것이다.(살전2:13). 설교는 기계적으로 효력을 발(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 효력을 발(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령의 감동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어떤 설교도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신비로운 감동하심의 역사로 말씀을 사용하실 때 그 설교는 효과적이 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성례에 참예하는 자들이 주님이 약속하신 살과 피를 먹음같이 믿음으로 설교자의 말씀 듣는 자가 주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은총을 받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례(聖禮)와 설교가 기록된 말씀에 의존해야 하나, 둘 다 성령의 은혜로운 임재로 채워질 때에만 실재적 은혜의 방편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3) 구원(救援)과 심판(審判)의 이중음성(二重音聲)의 설교
칼빈에 의하면 설교에는 두 가지 목소리 (이중음성)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온유(溫柔)한 음성이고, 둘째는 이리와 도둑을 쫓는 노성(怒聲)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사야 주석 55:11에서 “말씀이 신자들을 구원하는 데에 효과적인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는데도 충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증거의 역할은 죄인들에게 반발심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까지 반발심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과를 나타내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한 향기가 이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로 다른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 역사함과 같은 의미(고전2:15-16)인 것이다. 실제로 칼빈은 자신에 대한 많은 비난(非難)과 반대자(反對者)들을 극복(克服)해야 했다.
베자(Beza)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제네바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르는 개들을 “칼빈”(Calvin)이라고 부름으로써 개혁자에 대한 자신의 경멸감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는가 하면, 혹자는 칼빈의 이름을 줄여 가인(Cai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 칼빈에 대한 증오심”을 핑계 삼아 성찬에의 참여를 중단하였다고 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사람을 만족(滿足)시키려고 성경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무익하게 된다... 만족할 만한 복음 설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라는 말만이 필요하다. 선하고 진실한 목자는 성경을 간신히 해설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덕을 주기 위하여 진지하고 분명(分明)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는 어려움이 많아도 진실해야 됨을 가르친다. 무엇이 선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을 책망(責望)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청중(聽衆)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비록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눈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말하지 않을지라도, 복음은 그리스도의 권위로 말미암아 설교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을 듣는 자가 곧 내 말을 듣는 자라고 말하셨습니다. 모든 교직자가 주의 이름으로 설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야 된다는 것을 배웁시다. 그리고 우리자신은 그 설교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또한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 듣기를 멀리하는 자들은 마치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힘을 거절하고 또한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멀리 뿌리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으러 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그의 구속적 섭리(燮理)를 거절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아무것도 아닌 이 버릇없는 인간들은 자기네들이 잘못을 범하였을 때 그 사실을 자기들에게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 들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곧 '당신들이 우리에게 명령할 순 없어!'라고. 그렇다면 하나님도 않됩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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