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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 주님과 신부와의 불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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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4-09-2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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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강해(16) 2:8~9

주님과 신부와의 불일치

 

본지 부사장 조영만 목사.jpg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지난 한 주간 성령님의 인도로 잔치집에 들어가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하기에 상사병이 걸려 주님의 왼손이 여러분의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여러분을 안아주셨습니까? 이런 분들의 상태는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입니다.

 

지금도 주님의 사랑에 취해 꼼짝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과 기도에 대한 체험으로 잔치 집에 있지만 아직 주님과 결혼식을 치루지 않았기에 상사병에 걸려 주님 오시기만을 기다리는 신부들이 있습니다. 이런 신부들의 특징은 안식과 평안입니다. 광야 생활을 통해 어렵게 얻은 안식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과의 혼인잔치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신부단장하고 있는 신부들 중에는 세상을 끊고 육체의 일들을 버렸기에 주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 오시기만을 사모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세상을 끊었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일을 버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광야 생활을 통해 육체의 일을 버리지 않는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시온교회에서 신부단장하고 있는 신부들은 이런 육체의 일들과 세상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다 끊어버리고 주님이 베푸신 잔치집에서 말씀 묵상과 기도로 안식과 평안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시편 23장에 잘 나와 있는데 이와 같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딱 이와 같은 수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곳까지 이끄신 데는 다음 단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워밍업이었습니다. 다음 단계는 이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전에 광야 생활을 통해 육체의 일과 세상을 다 끊어버리고 주님이 베푸신 잔치집에서 말씀 묵상과 기도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하셨다면 이제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고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으로 제사장, 선지자, 왕의 직분을 말합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모든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과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나타내는 신부로 단장하기 위해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이 골짜기를 통과하는 신부들은 주님이 함께 하심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기를 안위하기에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고백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최고의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결과를 위해 육체의 일과 세상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다 끊어버리고 주님이 베푸신 잔치집에서 말씀 묵상과 기도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워밍업을 한 것입니다.

 

아직 이 단계까지도 오르지 못한 성도들도 있지만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이 먼저 본을 보인다면 함께 따라 올라올 것입니다. 광야생활을 통해 육체의 일들과 세상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다 끊어버리고 주님이 베푸신 잔치집에서 말씀 묵상과 기도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신부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서 신부가 고백합니다.

2:8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광야 생활을 통해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될 때 자칫하면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며 계속 그 자리에 머물고자 하는 유혹이 생깁니다.

 

17:1~4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이것이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 주님의 영광을 본 베드로의 마음인 것처럼 따로 높은 수준에 이른 신부들도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며 그저 주님의 왼손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안아주심만 바라고 어린양의 혼인잔치만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도 필요합니다만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이 지점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안식과 평안을 누리던 신부가 갑자기 신랑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한동안 주님 안에서만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되면 새로운 도전과 갈급함이 생기게 됩니다. 너무 피곤해서 한 숨 푹 자고 나면 더 이상 피곤하지 않기에 다시 잠자려고 하지 않고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신랑이 목소리를 내면 신부가 알아듣습니다. 주님의 인도로 말씀과 기도의 잔치집에 들어와 승리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안식과 평안을 누리며 잠들어 있는데 주님의 음성이 신부를 깨우는 것입니다. 마치 언제까지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겠니? 더 이상 쉬지 말고 이제 일어나 그 자리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깨어나 보니 주님이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옵니다. 자기를 잔치집으로 인도하셔서 사랑의 주님을 승리의 깃발로 체험하게 하시고 안식과 평안을 주셨는데 주님은 산에서 달리며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 것입니다.

 

아 난 잔치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주님은 지금도 달리고 넘어오고 계시구나!” 주님과의 이런 차이를 느끼고 계십니까? 제가 지금 주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고 있는데 세계 곳곳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면 꼭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일하겠습니다. 그만 이 안식과 평안의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언제, 어디서나 저를 사용해 주세요!”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 것은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말합니다. 어떤 장애나 어려움을 극복하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기에 잠자고 있는 성도, 죽어 있는 성도, 주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만을 누리고 있는 성도들을 깨우고 있지 않습니까? “작은 산은 크고 작은 문제들을 상징합니다. 산에서 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작은 산을 빨리 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시기 위해 달리고 빨리 넘어 오시는 것입니다. 더 큰 목적은 주님의 인도로 말씀과 기도의 잔치집에 들어와 승리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안식과 평안을 누리며 잠들어 있는 신부에게 왕궁의 혼인날을 받은 소식을 알려줘 깨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신부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가기에는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아가 2: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2:7절에 주님은 신부를 민감한 동물인 노루와 들 사슴으로 표현했는데 신부도 주님에 대해 노루와 어린 사슴으로 표현합니다. 단지 들 사슴이 어린 사슴으로 바뀝니다. 들 사슴은 아직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이 남아 있는 신부를 상징하고 어린 사슴은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이 없이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순종하신 주님을 상징합니다.

 

얼마 전까지 주님은 신부와 함께 잔치집에 있었지만 지금은 벽 뒤에 계시고 신부는 여전히 집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주님과 신부사이에 거리가 생겼음을 느끼지 않습니까? 잔치집에서는 하나였는데 지금은 신부는 집안에, 주님은 벽 뒤에 서 계십니다. 즉 신부는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데 주님은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받은 훈련 중에 하나가 구름이 머물면 멈추고 구름이 발행하면 움직여야하는 훈련이었습니다.

 

구름이 며칠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으면 그 자리에 머물러 생활하고 구름이 며칠간 계속 움직이면 쉬지 못하고 계속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며칠 만에 구름이 멈춰 천막을 치고 쉬려는데 갑자기 구름이 다시 움직입니다. 그럼 천막을 거두고 다시 움직이는 것입니다. 반대로 며칠 만에 구름이 움직여 천막을 거두고 움직이려는데 구름이 다시 멈추는 것입니다. 그럼 거둔 천막을 다시 쳐야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이 구름에 자기를 맞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고집이 강한 분들에게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건 지겨운 일입니다. 이 일이 쉬워지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자기 생각과 자기 고집을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름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지금 자기 영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들을 순종하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아주 지겨워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 짜증을 내고 싶은데 성령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당장 염려하고 싶은데 성령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 당장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싶은데 성령님은 용서하라고 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훈련입니다. 구름기둥은 바로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이 훈련을 통해 이스라엘이 자기 생각과 고집을 꺾음같이 우리도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이와 같은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벽 뒤에 있는 주님과 집안에 있는 신부는 아직 성격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벽 뒤에서 나오라고 하시는데 신부는 주님께 밖에서 뭐하세요? 빨리 들어오세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기뻐하지 못하고 짜증내는 우리를 이해해 달라고 합니다. 성령님은 용서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우리를 이해해 달라고 합니다.

 

성령님은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못하고 죄를 범하는 우리를 이해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아직 자아를 완전히 죽이지 못한 신부와 주님과의 차이입니다. 신부는 주님과 함께 안식과 평안을 누리고 싶고 주님은 신부와 함께 달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주님이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심으로 자신의 모습과 마음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살 틈이 있어서 서로 보이지만 서로 들어오고 나갈 수 없는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부부간에도 이런 팽팽한 긴장감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 성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서로의 고집과 생각, 누가 먼저 자기 고집과 생각을 꺾어야 하는 것입니까? 딤전 2:11~15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남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신랑, 우리는 다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인도로 말씀과 기도의 잔치집에 들어와 승리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안식과 평안을 누리며 잠들어 있는 여러분!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시는 주님께 나아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집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면서 주님을 계속 서 계시게 하실 것입니까? 자기 생각과 자기 고집을 꺾고 주님이 서 계신 곳으로 나가 주님과 함께 달리시는 주님의 신부들이 되시기를 우리의 마음과 생명과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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