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아가 강해(31) 아 4:9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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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5-02-01 10:52본문
아가 강해(31) 아 4:9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1.
아 4: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지난 시간에는 술람미 여인이 주님께 8가지 칭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죄성 곧 어두움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는 결단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 최초로 “나의 신부야”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는 결단을 하게 된 신부에 대해 주님은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칭찬하십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그 모친이 씌운 면류관 곧 주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어 주님께 8가지 칭찬을 받고 나서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는 결단을 하신다면 주님께 “나의 신부야”하는 호칭과 함께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칭찬의 결과로 주님은 신부에게 승천의 단계를 보이시고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 곧 주님의 승천과 연합한 위치에서 내려다보므로 공중의 사자 굴과 표범 산에 있는 원수 마귀 사탄을 대적하고 심판하게 하십니다. 지난 한 주간 승천의 위치에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며 공중의 사자 굴과 표범 산에 있는 원수 마귀 사탄을 대적하고 심판하며 잘 사셨습니까?
대통령이 되기 전에 했던 사회 경험, 정치 경험, 경제 경험, 대인 경험과 대통령이 된 후에 하는 사회 경험, 정치 경험, 경제 경험, 대인 경험은 레벨이 다르다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승천과 하나가 된 단계를 경험하기 전에 가졌던 죽음과 부활의 경험과 주님의 승천과 하나가 된 단계를 경험한 후에 가지는 죽음과 부활의 경험이 아주 다릅니다.
주님의 승천과 하나가 된 단계를 경험했다면 염려하라는 죄성이 나올 때 염려하는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염려하지 말라는 새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실이 즉시로 믿어져 금방 ‘염려하라’는 악을 죽이고 ‘염려하지 말라’는 선을 이룹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는 일들이, 예수님과 함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이 부활하는 일들이 주님의 승천과 하나가 된 단계를 경험하면 이때부터 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승천의 단계를 지식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아 1: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하며 포도주보다 나은 주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주님을 갈망했고 그 결과 왕의 침궁으로 인도된 술람미 여인은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서 비둘기 눈, 백합화, 비둘기, 연기 기둥, 연 곧 가마, 면류관으로 성장하여 주님께 8가지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는 결단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 최초로 “나의 신부야”라는 호칭을 듣는 동시에 승천의 단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술람미 여인이 밟았던 과정을 밟지 않고서는 주님의 승천의 단계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지식으로 먼저 주님의 승천의 단계를 알았다고 해도 주님의 승천을 경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피겨 여왕 김연아의 동작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다고 해도 막상 자신이 해 보면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과 실전에서 직접 해 보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내 옛사람의 죽음,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 새사람의 부활, 그리스도의 승천이 내 영혼의 승천이라고 아무리 믿고 고백해도 경험해 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옛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죽음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행함을 보여야 합니까? 불평이 나오고 혈기가 나오고 판단이 나오고 시기가 나오고 비방이 나오고 미움이 나올 때마다 이런 것들이 이미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은 옛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기에 대적하고 심판하고 장사지내야 합니다.
한 번 실습해 보겠습니다. 지금 막 불평이 마음 안에서 나오려고 합니다. 이때 “불평하는 나의 옛 사람은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그러니 넌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게서 떠나갈지어다.” 그러면 불평이 마음 안에서 떠나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옛사람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믿은 증거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새사람의 부활이 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평하는 죄와 불평하는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시고 불평하지 말라는 선과 불평하지 말라는 새 사람을 부활시키신 사실을 믿고 우리가 불평을 대적하는 행함을 보였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도 경험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우리가 믿고 행했기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로인해 결국에는 주님의 승천도 함께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이 말에 대해 “어 목사님 그러면 절보고 지금 죽으라는 것입니까? 자살이라도 해서 죽어야 부활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으실 분이 계십니까?
제가 말씀드린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이며 유대 율법사요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었던 니고데모에게 주님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을 때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주님께 질문한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이해하더라도 아직 경험은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분들에게는 주님의 승천과 하나 되는 경험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주님을 처음 만나 거듭났을 때 잠시 승천의 단계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첫 사랑이요 술람미 여인이 아가 1장에서 경험한 왕의 침궁의 경험입니다.
이런 첫 사랑의 경험, 왕의 침궁의 경험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경험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고 다시 첫 사랑의 경험, 왕의 침궁의 경험인 승천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경험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는 성도들은 아직 주님과의 첫 사랑의 경험, 왕의 침궁의 경험이 없는 것이고 그 근본 원인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 결국에는 주님의 승천하심에도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죽어야 하고 부활하심과 함께 부활 하셔야합니다.
그래서 긴 시간을 들여 “여러분의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의 문제점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알고 믿고 있는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은 알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여러분의 죽음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여러분의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저에게 이렇게 반문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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