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주님의 임재를 회복하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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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4-07-20 09:09본문
아가서 강해(7) 아 1:8절
주님의 임재를 회복하는 방법은?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 지난 한 주 동안 열심히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이런 기도와 갈망은 주님의 왕궁의 침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린 신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기도와 갈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도리어 이런 기도와 갈망으로 주님께 목말라하는 신부들을 향해 “너무 지나치게 믿는 거 아냐? 왜 저럴까? 적당하게 믿으면 될 텐데! 뭐가 문제가 있는 거지? 그냥 쉽게, 편하게 신앙생활하면 될 텐데!”하고 충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어린 신자들 틈에서,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갈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 리더들 틈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며 다시 첫사랑을 회복하려고 주님을 찾는 신부는 눅 15장에 있는 돌아온 탕자와 같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자기 혼자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결과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주는 이가 없어 굶주릴 때 비로소 아버지 집이 생각나서 돌아간 것 같이 왕의 침궁을 경험한 후에 그 경험에 노한 교회의 리더들에 의해 교회 형식에 준행자가 되어 자기 마음은 지키지 못한 술람미 여인이 다시 주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고자 일어선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자기 분깃을 달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곁을 떠났을 때 겸손한 마음이 되어 다시 이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램같이 주님도 첫사랑을 은혜로 경험한 신부가 그 첫사랑을 잃고 자기 뜻대로 살다가 다시 겸손해져서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 원함을 발견한 신부의 고백이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에는 친밀함과 풍요함과 안식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이런 친밀함과 풍요함과 안식이 있다면 주님이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발견한 것입니다. 혹여 아직 이런 친밀함과 풍요함과 안식이 없다면 지금부터 저와 함께 주님이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주님이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고 갈망하는 술람미 여인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이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찾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지금도 지구에는 주님의 수많은 신부들이 있습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 받은 수많은 신부들, 그중에 택함을 받은 신부들은 적습니다. 그래서 택함을 받은 신부들은 여인 중에 어여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누가 여인 중에 어여쁜 자라고요? “주님이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고 갈망하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것은 친밀함과 풍요함과 안식에 대한 갈망 이전에 주님에 대한, 주님 자체에 대한, 주님의 인격에 대한 갈망입니다. 억만장자인 청년에 대한 처녀의 사랑 고백이 그가 가진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갈망이라면 억만장자인 청년은 자신을 감출 것입니다.
하지만 처녀의 사랑 고백이 청년 그 자신에 대한 진실한 갈망이라면 억만장자인 청년은 그 처녀를 아내로 맞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의 갈망은 주님을 만족시켰기에 그 여인에 대해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하고 칭찬을 하십니다. 이 여인은 주님과의 친밀함을 잃은 여인입니다. 첫사랑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여인에 대해 주님은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하고 부르십니까?
이 여인은 자신이 비록 검으나 아름답고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다는 사실을 깨달은 여인입니다. 또한 자신의 현재 상태가 자기 마음을 지키지 못해 주님과의 친밀함을 잃고 세상에 치여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머물렀다면 분명히‘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하는 칭찬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상태에 처한 사춘기 신앙에 접어든 신부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 주님의 칭찬을 받는 단계는 “주님이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는 갈망으로 첫 사랑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입니다.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술람미 여인은 예전에 누렸던 주님의 친밀함과 주님의 임재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 해매였습니다. 이런 행동이 진정이었기에 결국에는 응답을 받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술람미 여인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응답은 무엇입니까?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이 말씀은 주님이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에 이르는 길입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걸어간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가는 성도와의 교제입니다. ‘양떼의 발자취’는 많은 양들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했던 경험입니다. 교회안에도 먼저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신부가 있습니다. 자기 신앙보다 조금 앞서 있는 신부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과 교제함을 통해 자신도 주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의 침궁을 경험한 신부, 주님과의 첫 사랑을 경험한 신부가 자칫하면 교만해져서 고립될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최고로 여겨 다른 신부들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교만해져서 고립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광명한 천사의 방문을 받고 신비한 현상에 사로잡혀 귀신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부터는 자기 위에 세운 목자나 앞서서 주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의 리더들의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초신자 때 자기를 양육하던 윗사람을 무시하는 말과 행동이 나오기도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이런 모습으로 인해 주님과의 친밀함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 말에 대해 어떤 신부는 “왜? 내가 주님과의 친밀함과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까? 내가 잃은 것은 주님과의 친밀함과 첫 사랑인데 이것을 회복하는데 양떼의 발자취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성도들과의 교제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그냥 주님이 직접 내게 주시면 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한 개인이 아니라 단체의 몸, 곧 그리스도의 몸을 얻고 싶으신 것입니다. 시 13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엡 4:11~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본래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지만 결국 한 몸된 교회를 만들기를 원하시며 각 개인은 그 교회 속에 흡수되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각 개인을 구속하시는 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천 명이 출석하는 교회일지라도 천 명의 개인이 있을 뿐입니다. 차라리 50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50명이 한 몸이 된다면 천 명의 개인이 있는 교회보다 더 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성도가 한 몸을 이루는 것,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이것이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 친밀함을 회복하는 비결입니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내 어미의 오라비들이 나를 다른 포도원지기를 삼았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의 리더들이 자신을 혹사시켰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난 교회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있는 거라고 핑계되지 마십시오! 이것들이 성도와의 교제를 멀리하고 모이기에 힘쓰지 않은 이유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결국은 자신이 교만했기에, 스스로 높아졌기에 앞서 가는 성도와의 교제를 끊고 주님과의 첫 사랑과 주님과의 친밀함을 잃은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친밀함을 회복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이제 앞서 가는 성도와의 교제를 회복하십시오! 먼저 자기를 인도하고 양육했던 분들과의 교제를 새롭게 하십시오!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저에게도 심방요청을 하십시오! 일 년 내내 기다려도 심방을 요청하지 않는 성도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저보다 앞서 달려가고 있다고, 저보다 주님과 더 친밀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심방요청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왕의 침궁에 들어 가셨으니까요! 그런데 저희 교회에서 이런 분은 아직 한 사람도 찾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시온의 성도 여러분! 주님과의 친밀함을 얻기 위해서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도 목자들의 장막 곁에 계십니까? 어느 목자의 장막 곁에 계십니까?
기독교방송에 나오는 유명한 목사님들의 장막 곁에 계십니까? 방송을 통해 은혜 받고 있는 목사님들의 장막 곁에 계십니까? 혹시 자기가 지금 어느 목자의 장막 곁에 있는지 모르는 성도가 계십니까? 아마 이럴 분도 있을 겁니다. “저는 오직 주님의 장막 곁에 있습니다.” 꽤 신령한 척하지만 틀렸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이라”고 하신 게 아니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목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목자는 다른 목자들이 아니라 이 시온교회의 담임목사인 조영만목사입니다. 이걸 인정하지 못한다면 다른 목자에게 가야합니다. 그래야 주님과의 친밀함과 첫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조영만목사가 자기의 목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제 곁에 남아 있다면 결코 주님과의 친밀함과 첫 사랑을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시온의 성도 여러분! 제가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목자입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으로 부탁드립니다.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이제 주님과의 친밀함과 첫 사랑을 회복하시려는 신부가 있다면 제가 부족해도 제 곁에서 염소 새끼를 먹이십시오! 이 염소 새끼가 누구입니까? 천방지축 날 뛰는 염소 새끼가 누구입니까? 아직 주님과의 첫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성도들입니다. 자신이 비록 검으나 아름답고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린 성도들입니다.
이들을 위해 제 곁에서 수고할 때 주님의 친밀함과 첫 사랑을 회복하여 왕의 침궁의 경험을 다시 하게 되실 줄 믿습니다. 오늘 이 계시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순종하시므로 놀라운 주님의 임재와 친밀하심과 첫 사랑을 회복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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