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세이 외상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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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4-08-29 18:05본문
외상장부
하늘의 사랑을 품은
초록 같은 세상을 함께 맞으며
40년을 함께 걸어왔던 아내를 암으로
먼저 보낸 아버지는
살아야겠다는 의지조차
떠나는 아내에게 줘버린 것인지
봄을 놓아버린 꽃처럼 시들어가는
나날들을 보내던 중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래요?"
"건강하셨잖아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려는듯
서열없는 말들만내뱉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던
자식들의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더니
"손자들도 보고 싶고 한번 다녀가렴"
"저 미국 출장이라 바빠요"
"그럼 다음 주는?"
"그때는
아이들 수능이라 못 갈 것 같고요"
다음에.....
다음에 라는...
앵무새
같은 말들만 뱉어놓는 자식들을 보며
오뉴월 땡볕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가슴으로 홀쭉해진 달만 바라보던
아버지에게
"김씨 너무 섭섭해 마쇼
자식도 제 둥지 틀고 나면
그저 가까운 이웃일 뿐이니까:
"요양병원은
현대판 고려장이나 다름없어"
"지 부모 언제 죽나 확인하러 오는 것 같아
난 오지말렜수 ."
속눈썹 끝에 걸린 눈물을
데려가려는지
한 계절이 쉬 가버린 추운 겨울날
병원으로 달려온 자식들은
한결같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뭐야 ..
암이 아니고 허리 골절이었다잖아"
"지금껏 왜 아버진 암이라고
우리들을 속이신 건지 "
"내말이.."
"노망 나신거 아냐?"
시린 겨울이 와도
자식들과 살가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입가에 흐린 미소 한 점을
하늘에 별이 되어있는 아내에게
띄워 보내던 아버지는
혼자 우는 일이 없도록
두 눈이 된 눈동자에서
말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지우며
자식들에게 차례차례 전화를 겁니다
"유산을 물러주겠다고 모이라시네"
"개털인 아버지가?"
"아버지가
뭔 숨겨놓은 돈이라고 하고 있대?"
"맨날 돈 없다더니 뭔 유산..?"
"형님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아버지가 있는 옥상공원으로
빨리들 가보자고요"
네모나게
눈을 뜨고 있는 자식들을 앉혀놓고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놓은
노트 한 권씩을 내밉니다
점점 멀어지는 자식들에게
네권의 노트를 차례차례 건네주더니
"너희들을
지금껏 키우며 장가갈 때까지
뒷바라지 한 돈들을 적어놓은 장부다."
"치사하게 뭘 이런 걸 적어놓고 그래요"
"부모니까 당연히 해주는 거 아녀요 "
"다른 부모들도
다 하는 걸 뭔 생색을 내시려고
이렇게 일기장처럼 적어 놓으셨대"
"외상장부 같은 이 딴걸 적어놓고
우릴 채무자로 만드시네요"
“부모가 되어서
이걸 받겠다고 적어 놓은 거겠니
니네들을 키우며 애쓴 부모의 흔적들을
보라는 게야“
휘어진 등줄기 따라
살아온 지난 날을
지나는 바람을 붙들고 이야기하듯
아버지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진정 모르겠니?”
“........“
“니네들도 부모니까 알잖니
부모로 애쓴 만큼
효도로 돌려받고 싶은 그 마음을....“
“우리가 불효한 게 뭐 있어요?“
“이제 너네들 속마음을 다 알았으니
더 이상 마음에도 없는 짓 할 필요 없고
그 외상장부나 가지고들 가서
네 새끼들이 불효할 때마다 꺼내서
읽어봐“
그렇게
살아도
죽은 시간을 보내던 아버지는
그리 멀지 않은 하루를 살다
바람 속에서 이별을 전하고는
아내가 있는 하늘나라로 떠난지
십 여년이 흐르던어느 날
아버지의
제삿날을 맞아 모인 아들들은
긴 시간 자기 자식들로부터
되돌려 받고 있던 시간 속에서
눈물로 불어나 있는
더 두껍고 무거워진 외상장부를
차례차례 올려놓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서야 알겠다며....
펴냄/노자규의 골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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