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아가 강해(57) 아 6:11~14절 신부의 사역과 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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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5-09-13 12:23본문
아가 강해(57) 아 6:11~14절
신부의 사역과 비방
지난 한 주간 하나님의 본성인 영원한 생명 곧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죄와 사탄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에덴동산을 회복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됨으로 주님의 영광이 되는 신부가 되셨을 것입니다. 신부의 4가지 영광을 갖춘 것이 에덴동산을 회복한 결과이며 그 결과는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죄와 사탄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죄와 사탄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한다거나,
아예 자기 마음을 지키려하지도 않고 죄와 사탄도 다스리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다시 에덴동산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고 순종하는 훈련을 통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다 쫓아내지 않음으로 도리어 가나안에서 쫓겨난 것 같이 에덴동산을 회복한 성도라도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죄와 사탄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다시 에덴동산을 잃는 것입니다.
이런 저주스러운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바로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니 말씀 묵상과 기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사탄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말씀묵상과 기도만큼은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특히 마지막 때를 준비하고 있다는 교회에서도 방언은 마귀가 주는 것이라고 하며 방언 기도를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방언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영으로 열매 맺고 성령님과 친밀해지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방언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 없이는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질 수 없고 그로인해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죄와 사탄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실패함으로 에덴동산을 잃게 됩니다. 에덴동산을 잃었다는 것은 천년왕국에 들어갈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유지함으로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죄와 사탄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회복한 에덴동산을 절대로 잃지 않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6:11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이 본문은 주님의 영광이 된 신부가 주님과 한 마음을 이뤘기 때문에 비로소 주변의 신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갓난아이나 자녀나 청년의 단계에서는 자기 성장과 자기와의 싸움에 몰두하기 때문에 다른 신자들의 믿음과 성장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앞가림하기에도 힘이 부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성장하여 자기 마음을 지키고 죄와 사탄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에덴동산을 회복할 때 비로소 다른 신자들의 믿음과 성장에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아비의 단계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또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되는 계명을 이룬 자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되는 계명을 이루는 것과도 같습니다. 만약에 자기 마음을 지키고 죄와 사탄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는 실패하면서 이웃을 위해, 이웃 사랑을 위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다하더라도 주님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지금 신부는 자기 마음을 지키고 죄와 사탄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님의 4가지 영광이 되었기에 비로소 주변의 신자들에게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지금 신부의 마음은 골짜기 곧 광야와 메마른 땅과 사막 같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힘든 환경과 상황을 이겨나가는 푸른 초목인 신자들을 보려고 주님이 다스리시는 호도 동산으로 내려갑니다. 이때 신부의 관심이 온통 ‘골짜기의 푸른 초목’인 힘든 환경과 상황을 이겨나가는 연약한 신자들에게 쏠린다는 것은 주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신 목적과도 같습니다.
눅 4:17~21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때부터 신부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데 앞장섭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주변에 알고 있는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위해 기도하며 주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분이 계십니까? 자기 마음을 지키고 죄와 사탄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님의 4가지 영광이 되었기에 이런 일들을 하고 계시다면 영적 아비의 믿음이 된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신부의 두 번째 관심은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입니다.
호 10:1에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고 하심같이 포도나무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지금 신부의 관심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장에 있습니다. 자신도 구원 받은 후에 바로의 병거의 준마, 비둘기 눈, 백합화, 비둘기, 연기 기둥, 침상, 연, 면류관으로 성장 한 것 같이 주변의 신자들의 영적 성장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신부는 영적 갓난아이에서 자녀로, 자녀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아비의 단계로 성장했기에 주변의 신자들을 성장 시킬 수 있습니다.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온 신자만이 애굽에 있는 신자를 출애굽하게 하여 광야로 인도하는 것이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신자가 광야에 있는 신자를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가나안에 들어가 성령님과 함께 하나님의 원수인 일곱 족속을 멸하는 성도가 가나안에 들어간 성도를 가나안에 일곱 족속과 싸우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 성령님과 함께 하나님의 원수인 가나안의 일곱 족속과 원수가 되어 일곱 족속을 멸하는 성도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알기에 각 단계에 있는 신자들을 이곳까지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신부의 세 번째 관심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입니다. 석류나무는 석류를 생산하는 나무입니다. 제사장의 에봇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놓은 것같이 제사장의 에봇은 신부가 입을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입니다. 이 세마포는 계 19:8에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심같이 석류나무는 옳은 행실을 맺게 하는 나무로 지금 신부는 신자의 인격의 미덕이 옳은 행실로 나타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전에 신부는 주변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관심할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직접 주님의 동산이 된 신부에게 나의 친구들을 먹이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시게 하라고 요청하셨지만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이랬던 신부가 지금에는 주변의 신자들에게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기 마음을 지키고 죄와 사탄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님의 4가지 영광을 가진 신부가 되었다면 술람미 여인같이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힘든 환경과 상황을 이겨나가는 연약한 신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지금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지금 신자들의 인격의 미덕이 옳은 행실로 나타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 세 가지 신부의 관심을 여러분도 보려고 알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내려가셔야 합니다. 주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 세상에 육체를 입고 오신 것같이 에덴동산을 회복하고 주님의 4가지 영광이 된 상태에서 호도 동산으로 내려가셔야 합니다.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지금 신부는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호도 동산으로 내려갑니다.
호도 동산은 단단한 껍질 속에 감춰져 있는 자양분과 같이 아직 겉사람이 깨어지지 않은, 아직 자아 처리를 하고 있지 않은,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지 않는 교회를 말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는 밭에서 파내야 하며,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하듯이 교회 안에 단단한 껍질을 가지고 있는 호도들은 다 깨어져야합니다. 그러기 위해 이미 깨어진 호도가 샘플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깨어진 호도와 같은 신부를 호도 동산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아 6: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부지중에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저절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지금 신부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마음이 자기의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곧 백성들 가운데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신자들에 대한 신부의 사랑과 열정을 묘사합니다. 주님의 4가지 영광이 된 신부가 주님과 한 마음이 되어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자신의 마음이 자신도 모른채 자기의 귀한 백성에게 수레와 같이 이른 것입니다.
수레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지금 신부의 마음은 온통 자기의 귀한 백성들에게 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4가지 영광이 된 신부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왜 자기의 귀한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신부가 주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백성이 신부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왕의 백성은 왕비의 백성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골짜기의 푸른 초목 같이 힘든 환경과 상황을 이겨나가는 연약한 신자들, 순이 난 포도나무같이 성장하고 있는 신자들, 꽃이 핀 석류나무같이 인격의 미덕이 옳은 행실로 나타나고 있는 신자들이 이제 신부에게 자기의 귀한, 소중한 백성입니다.
아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이곳에서 처음으로 ‘솔로몬과 일치됨’을 의미하는 ‘술람미’로 그녀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진실로 하나가 된 성도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가 되었을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솔로몬과 일치된 술람미 곧 주님과 하나가 된 신부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아 6:1에서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고 했던 예루살렘 여자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룬 신부에 대해 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의 신부 위치까지 도달한다면 수많은 신부가 되고자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의 사모함과 방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물론 이런 일들과 함께 겪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신부의 열정과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는 지도자들과 영적 권위자들을 통해 여러분을 쳐서 상하게 하고 웃옷 곧 자존심과 여러분의 영광을 벗겨 취하는 사건을 다시 한번 당해야 합니다.
아 5: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환영과 반대가 있었던 것 같이 신부도 주님처럼 환영과 반대를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의 시험을 이기시고 사역을 시작하실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비방을 들으셨고 귀신을 쫓아 병을 고치시자 바리새인들에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는 비방을 들으셨습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그 형제들이라도 주님을 믿지 아니함으로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결국에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배척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신부도 신랑 예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 바울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시기 바랍니다.
아 6:13절에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환영과 존경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과 영적 권위자들이 조롱하면서 말합니다. 아 6:14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마하나임은 두 군대라는 뜻으로 야곱이 에서와 충돌했던 장소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라고 하며 신부를 군대에서 춤추는 여자로 비하합니다.
눅 7:33~34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신부가 예수님이 당하신 모욕과 비방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신부를 향한 환영과 존경을 가진 성도들도 교회 지도자들과 영적 권위자들에게 모욕과 비방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주님도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시온의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을 초월하여 독수리가 된 신부는 다시 이 땅에 내려와 연약한 신자들을 돌보고 희생하는 소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때 비로소 연약한 신자들에게 역사했던 사탄의 도전과 모욕과 비방을 견디므로 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단계를 지나 죄와 사탄을 완전히 이기는 자가 되사므로 진정한 사람, 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완전한 신부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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