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야곱의 遺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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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3-11-04 14:43본문
야곱의遺言(4)
천국 입성을 앞두고 야곱의 유언(遺言)
◀ 계시의 증언 정기남 목사(지저스타임즈 발행인/한국기독교언론부흥사협의회 상임대표)
지난 1차 강의를 통해 “고센 땅에 거주한 야곱의 가족”에 대해 말씀을 전하면서 신앙생활에 주의점에 대한 말씀에서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다시 설명하면 불신 세계의 사람들은 기독교가 하는 선행에 대해선 좋아하지만, 기독교가 행하는 종교의식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시간을 방송하면서 종교의식이란 말을 했는데 우리는 종교의식이란 말은 잘못된 용어이다. 우리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종교란 사람들이 만든 것들을 가리킨다. 우리 기독교는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종교가 아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위를, 바로 예배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의 의식은 바로 예배이지 어떤 종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어떤 종교의식으로 같은 레벨로 보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말씀드릴 것은, 우리 기독인들이 세인들을 대할 때, 하나님의 진리에 따른 선행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전도는커녕 전도에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또한 주의할 것은, 어떤 공공장소에서 확성기를 크게 높여서 찬송과 말씀을 전한다면 우리는 이해가 되지만 세인들의 귀에는 엄청난 소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세인들은 우리가 전한 복음과 찬송에 감동은커녕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을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컨대 어느 분주한 버스 정유소나 열차나 전철역에서의 예배 의식은 유익 될 게 없다는 말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노방 전도나 공공장소에서의 전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지만 덕을 세우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며 일어나서 전도하는 것은 참으로 좋다.
다시 본문으로 들어간다. 야곱은 가나안을 떠나와 이집트에서 거주한 지 17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그의 나이는 147세가 되었다. 그러나 야곱은 단 한 번도 가나안땅을 잊어 본적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살라야 한다는 것과 가나안 땅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신앙 문제와 깊은 연관(聯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은 이러한 맥락(脈絡)에서 천국 입성을 앞두고 야곱의 유언(遺言)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길 기원함.
1. 야곱이 유언을 한 “나이”와 “때”에 대하여 알아본다면
1) 야곱이 유언을 한 “나이”는 147세이다(28). 야곱의 나이 147세는 야곱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소모한 세월이다. 야곱이 147년 동안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험악한 인생을 통과해 왔다.
2) 야곱이 유언을 한때는 죽을 기한이 가까왔을 때이다(29). 야곱은 이미 자기가 죽을 기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혜(智慧)는 죽음이 임박했기 때문에 깨달은 지혜가 아니다. 야곱은 죽기 전에 이미 자기의 죽음을 예측(豫測)하고 있었다. 이것이 곧 야곱의 영적(靈的)감하(感賀)이다. 시편(詩篇) 90편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에게 우리의 날들을 세도록 가르치시어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라고 시편 기자는 노래하고 있다.
시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기도하는 내용이다. 모세는 여기서 우리의 생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어도 그 연수의 힘은 수고와 슬픔이니, 그것이 끊어지면 우리가 멀리 날아가나이다(10).라고 했다. 우리 인생들의 연수가 날아가이나다. 고 했다. 그럼면서 모세는 인생의 영수를 헤아릴 수 있는 지혜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이처럼 야곱에게는 하나님께 얻은 지혜가 있었다. 그러므로 야곱은 자기 인생의 연수를 정확하게 헤아려서 천국 입성을 앞둔 임종이 가까운 것을 알았던 것이다. 즉 우리의 연수가 한갓 이야기처럼 지나가나이다. 고 했다. 한갓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지나가는 자기 인생의 연수를 헤아릴 수 있는 자는 이미 하나님께 지혜의 마음을 얻은 자다.
2. 야곱의 유언(遺言)을 받은 자에 대해서 알아보자
야곱의 유언을 받은 자는 요셉이다(29). 야곱이 열두 아들 중에서 요셉에게만 유언을 한 것은 요셉이 야곱의 신앙을 계승(繼承)한 자였기 때문이다. 즉 아브라함의 이삭이 계승(繼承) 받았고, 이삭의 신앙은 야곱이 계승(繼承) 받았는데 이 야곱의 신앙을 계승(繼承)한 자는 요셉이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만을 조용히 불러서 유언을 남긴 것이다.
사실 유언이란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언을 받을 수 있는 자격자는 그 유언하는 자의 모든 사상(思想)과 가치관(價値觀)을 계승(繼承)한 자라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만 유언인 지상명령(至上命令)을 남기셨다. 이는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상과 가치관을 계승한 자였기 때문이다.
3. 야곱이 요셉에게 유언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보면
야곱이 요셉에게 유언을 하는 방법은 맹세를 지키는 것이었다. 왜 야곱은 유언을 받는 요셉으로 하여금 맹세를 시켰는가? 이는 유언의 내용이 너무나도 귀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세를 받지 않고는 쉽게 유언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맹세는 자기 생명과 연관(聯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맹세는 자기 생명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세를 시키는 자는 중요한 일이 아니면 함부로 맹세를 시키지 않았고, 또한 자기 생명을 걸만한 중요한 일이 아니면 맹세를 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야곱에게 한 유언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에게 유언을 하기 전에 먼저 요셉이 인애와 성심으로 유언을 지키도록 맹세를 시킨 것이다.
4. 야곱이 요셉에게 한 유언의 내용이 무엇인가?
야곱이 요셉에게 한 유언의 내용은 자기가 죽거든 이집트에 장사하지 말고 선영에 장사하라는 것이었다(30절). 여기서 선영에 장사하라는 뜻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힌 막벨라 굴에 묻어 달라는 유언인데, 이 유언 속에는 몇 가지 중요한 뜻이 숨겨져 있다.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심어주려는 유언이다. 2)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산 아브라함의 신앙을 심어주려는 유언이다.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을 전수(傳授)하려는 유언이다. 4) 야곱의 후손은 이집트에서 살 자가 아님으로 이집트 신앙을 심어주려는 유언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야곱의 유언과 요셉의 유언이 사상적(思想的) 신앙적(信仰的)으로는 맥락은 같아 보이지만, 유언이 효력(效力)을 주는 대상(對象)과 시간에 대해서는 각각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야곱의 유언은 시간적으로는 현재성을 띠고, 대상은 야곱의 직계가족인 70명에 대한 유언이지만, 요셉의 유언은 시간적으로는 미래성을 띠고 유언의 대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를 떠나는 데까지의 야곱의 유언의 후손 전체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야곱의 유언은 가나안 신앙에 대한 현대적 고취 방법이고, 요셉의 유언은 가나안 신앙에 대한 미래적 고취 방법이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유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거주하는 430년 동안에 가나안 신앙을 붙들음으로서 이집트화 되지 않고 살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그래서 야곱과 요셉의 이러한 신앙 정신은 이집트에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이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손들에게 무엇을 유언으로 남길 것인가? 신앙 정신인가? 재산인가?
4. 야곱의 유언을 받은 요셉의 자세(姿勢)는 어떠했는가?
야곱의 유언을 받은 요셉은 “내가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리이다”. 라는 자세를 보여 드렸다(30절). 실로 부전자전(父傳子傳)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면 두려워서 벌벌 떨면서 한마디도 거역함이 없이 순종하는 야곱과 역시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떨면서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득죄 하겠느냐(창 39:9). 는 요셉은 서로 똑같은 자로서 이들 부자간의 영적 신앙의 순종력(順從力)은 막상막하(莫上莫下)이다.
실로 귀한 가정이다. 부권(父權)을 가지고 한마디 엄명(嚴命)하는 아버지 야곱이나, 부친(父親)의 엄명(嚴命)이 떨어지기도 무섭게 ‘내가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리이다’라고 겸손히 고백하는 요셉의 관계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실로 오늘의 부권(父權)은 이미 땅에 떨어진 시대라고 해도 실언(失言)이 아닐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儒敎(유교)의 영향권(影響圈)에서 살아온 우리네 사회에서도 부위자강(父爲子綱)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지 오래되었다고 본다.
출 21:15에 “그 아비나 어미를 친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하셨고, 출 21:17에는“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 27:16 “자기 아비와 어미를 천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말하기를 "아멘." 할지니라. 마 15:4)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이르시되,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하셨다.
보문을 보면 요셉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겠다는 다짐은 요셉이 아버지의 환송 예식을 한 후 가나안 땅에 모심으로서 첫째는 하나님의 言約(언약)을 지키겠다는 것이요, 둘째는 가나안 信仰(신앙)을 버리지 않고 살겠다는 것이 요셉의 대답 속에 들어있다. “말씀하신 대로 행하리이다”라는 順從(순종)의 姿勢(자세)는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의 姿勢(자세)이기도 하다(눅 1:38 參考(참고)).
4. 遺言(유언)을 마친 야곱의 자세는 어떠했는가?
야곱은 자기의 마지막 사명을 마쳐놓고, 누워있던 그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드렸다(31). 이는 야곱의 경건성을 묘사한 것으로서 실로 야곱이 있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지 흔히 볼 수 있는 야곱의 경건한 모습이다. 오늘 우리는 이점을 바로 깨닫고 배워야 한다.
오늘도 야곱은 자기 생애에서 마지막 일이며, 가장 중요한 일을 마쳐놓았고, 평상시에 하던 대로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올렸다. 실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야곱의 敬虔生活(경건생활)이며, 야곱의 感謝生活(감사생활)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生活(생활)과 感謝(감사)하는 생활이 습관적으로 몸에 배어 있어서 항상 무슨 일을 마칠 때마다 야곱과 같은 경배가 나와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우리 자식들에게 우리 社會(사회)와 國家(국가)에 둘 수 있는 遺言(유언) 법 조항을 많이 만들어 놓았으면 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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