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센 땅에 거주한 야곱과 가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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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3-09-16 12:32본문
고센 땅에 거주한 야곱과 가족 (1)
◀ 계시의증언 정기남 목사(지저스타임즈 발행인/한국기독교언론부흥사협의회 상임대표)
창 47:1-27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야곱의 가족이 고센 땅에 거주하는 것(1~6)과 야곱이 파라오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것과 (7~10), 요셉이 비축한 식물을 가지고 부모 형제들을 공궤했다는 내용이(11~12), 기록되어 있다.
첫째 1~6절을 보면 야곱이 가족이 고센 땅에서 거주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족들이 어디에서 안착하고 살아야 좋을까 해서 요셉을 통하여 이미 계획하시고 예비해 놓으셨다. 그곳은 바로 이집트의 고센 땅이다. 모세 때 이 고센 땅에 국고성 라암셋을 건설한 후부터 이곳을 라암세스라고 부르기도 하였다(출 1:11, 12:7). 요셉은 바로 이곳에서 부모와 형제들이 거주하시도록 배려하였고(46:3~4). 요셉의 배려대로 형들도 바로에게 가서 고센 땅에서 살도록 해 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47:1~4).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족을 고센 땅에서 살도록 배려하셨는가? 그 이유를 살펴보면, 1. 이집트인들이 목축업을 가증이 여기셨기 때문이다(창 46:34). 즉 농경이 주업인 이집트인들은 목축업을 가증이 여겼기 때문에 싫어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인들의 거주지로부터 한적한 고센 땅을 택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로 삼으셨다. 이는 이집트인들에게 하나님의 百姓들이 혐오감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이시다.
현재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주의해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신자들은 우리들의 선행은 좋아하지만 우리들의 예배의식까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불신자들을 대할 때에 하나님의 진리에 따른 선행으로 대하지 않고 예배의식으로 대한다면 전도는커녕 오히려 전도 길이 막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든다면 기독교의 예배장소가 될 수 없는 공공장소에서의 예배행위는 불신자들을 감동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을 줄 뿐이다.
예컨대 어느 분주한 버스정류소에서의 예배행위는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기 쉽다. 교회나 가정집에서도 얼마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하필이면 공공장소인 분주한 버스정류장에서 목청을 높이며 예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인들이 싫어하는 목축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를 이집트인들의 거주지로부터 구별된 고센 땅에 정하셨다.
왜? 우리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이 이방인들에게 멸시받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오늘 각자가 은혜가 된다고 해서 불신자들에게 멸시받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를 고센 땅으로 定하신 것은, 이집트인들의 거주지와 거리를 두시고 이스라엘을 번성시키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계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크게 번성시키실 때까지는 이집트인들의 시기를 사지 않게 하시려는 뜻으로 이집트인들의 거주지에서 거리를 둔 고센 땅으로 이스라엘의 거주지를 삼으신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에 크게 번성한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인들에게 시기와 멸시를 살 것이 뻔한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큰 민족으로 번성하기도 전에 핍박을 받지 않게 하시려는 세심하신 배려로서 고센 땅을 이스라엘의 거주지로 정하신 것이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크게 번성한 까닭으로 이집트인들에게 큰 핍박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두 다 걸러내신 뒤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이 번창하는 과정에서 이집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고센 땅을 이스라엘의 居住地로 定하신 것은, 목축업이 주업인 이스라엘의 기업을 크게 번성시킬 수 있는 독립된 사업장으로서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고센 땅이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고센 땅을 이스라엘의 거주지로 정하신 이유를, 앞에서는 “후손 번성”이라는 입장에서 설명했는데, 이번에는 “산업 번성”이라는 입장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후손 번성을 위하여 이집트인의 거주지에서 격리된 고센 땅에 이스라엘의 거주지를 삼으셨는데, 이스라엘의 산업 번성을 위해서도 역시 이집트인들과 격리된 곳에 이스라엘의 거주지를 정하셨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이집트인들의 시기를 사지 않고 번성시키기 위해서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목축업은 이집트인들이 가증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기업이 아무리 번창한다고 해도 이집트인들에게 경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러는 사이에 이스라엘의 목축산업은 나날이 번성하여 급기야는 이스라엘의 산업 생필품인 양고기와, 양털과, 양가죽이 이집트의 전시장을 석권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되기까지 이스라엘의 산업이 방해를 받지 않도록 이스라엘의 거주지를 고센 땅으로 정하신 것이다. 실로 깊으신 하나님의 섭리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베풀어지고 있다. 이것을 의식할 줄 아는 것이 영적 감각이 뛰어난 자이다. 아멘
넷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거주지를 고센 땅으로 정하신 것은 이집트인들의 거주지와 격리 시킴으로서, 이스라엘의 이집트화를 막으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체류하는 400년 동안 가장 염려되는 것이 있다면 이스라엘의 이집트화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체류하는 동안에 이집트인들과 연합하여 점점 이집트화가 된다면 이스라엘이 아무리 숫자적으로 번성을 하고 또는 산업이 번창한다고 해도 이는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거주지를 고센 땅으로 정하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깨달아야 할 교훈이 많다. 그것은 곧 성도에게 있어서 신앙번성은 후손번성보다 앞서야 하고, 산업번성보다도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만고, 성도가 신앙번성보다도 후손번성이나 산업번성을 더 귀하게 여긴다면 이는 불신자와 다를 것이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외적인 번성도 중요하게 생각하셨지만 이것보다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우려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이집트화였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신앙이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 생각, 마음, 의도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고센 땅을 이스라엘의 거주지로 정하신 것은 고센 땅이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국경지대라는 데에 있다. 즉, 이 고센 땅은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국경지대로서 고센 땅 자체는 이집트의 영토지만, 홍해 강을 건너면 가나안의 영토가 전개되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국경지대인 고센 땅을 이스라엘의 거주지로 삼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깨달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고센 땅 거주는 이집트를 전제한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로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후손의 이집트를 전제로 해서 고센 땅을 이스라엘의 거주지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영존할 백성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언제든지 한시라도 이집트를 출발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야 할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후에 있을 이스라엘의 떠날 이집트를 용이하기 위해서 고센 땅을 이스라엘의 거주지로 삼으셨다.
실로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가 영존할 주거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명령하시면 우리는 언제든지 한시라도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에 있는 거룩한 가나안으로 입성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깊은 정착은 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하시면 언제든지 순종할 수 있도록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국경지대에서 거주하고 살아야 한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너무 정착하고 살면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실 때 이 세상을 버리고 순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세상과 천국의 국경지대란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자기를 부정 낮춤하고 사는 그 자리가 바로 신앙의 국경지대다.
1. 야곱과 파라오 왕의 만남은 당시 세계 제1의 人物들의 만남이다. 파라오 왕이 當時에 世界 제1의 政治的 統治者며, 世界 제1의 皇帝였다면, 야곱은 當時 世界 제1의 宗敎的 統治者며, 世界 제1의 하나님의 종이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하늘과 땅이 다 알아주는 歷史的인 만남이다. 오직 사람들이 눈이 어두워서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2. 야곱과 파라오의 만남은 단순히 인사치례를 위한 만남이 아니고, 야곱이 파라오 왕을 축복하기 위해서 만난 것이다. 당시 야곱은 족장으로서 중동지역에서는 유일한 선지자며, 제사장이며, 영의 왕이다. 뿐만아니라 야곱은 중동지역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자다. 야곱은 이를 위해서 파라오에게 나아간 것이다. 파라오 왕은 세계 최대의 황제지만 至令만큼은 야곱의 靈的手下로 들어와서 야곱의 복 빎을 받고 있고, 또한 야곱은 세계 최대의 하나님의 종으로서 파라오 왕을 自己手下에 놓고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야곱은 세계 최대의 황제인 파라오 왕을 축복함으로서 명실상부하게 세계 제1의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 종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축복을 빌어줄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근례에 와서 축복을 빌어주는 주의 종들의 입장과 권한이 너무 남용되고 있어서 어떻게 보면 주의 종이 하나님 같이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 못내 서글프다.
3. 야곱이 파라오에게 밝힌 나그네길 130년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⑴ 야곱의 생애 130년은 이 세상에서 오직 나그네로만 살아온 세월임을 묘사하고 있다. 야곱은 결코 자기 인생을 이 세상에다 固着하고 살지 않았다. 그것은 이 세상이 영존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오직 天國에만 所望을 두고 살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는 항상 나그네의 입장으로 살았으며, 또한 야곱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나그네의 입장을 한번도 벗어나서 살지 않았다. 실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착된 삶을 살아간다면 불신자와 똑같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를 이집트와 가나안의 국경지대인 고센 땅으로 정하신 뜻을 잊지 말라.
⑵ 야곱의 생애 130년은 야곱이 信仰을 爲하여 險惡(험악)하게 살아온 세월이다. 실로 야곱처럼 險惡(험악)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드물다. 야곱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險惡(험악)한 인생을 살아왔겠는가? 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다. 야곱은 母胎(모태)에서부터 자기를 選擇(선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恩惠(은혜)가 자기에게서 效果的(효과적)으로 나타날 때까지 不斷(부단)한 信仰(신앙)의 싸움을 싸웠다. 실지로 信仰生活(신앙생활) 하면서 야곱처럼 많은 환난과 시험을 겪은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야곱이 通過(통과)한 환란과 試驗(시험)을 보면 그가 얼마나 험악하게 살았는지 가히 짐작을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야곱은 信仰을 위해서 겪은 험악한 삶의 경험이 풍부하여 그것을 햇수로 표현하면 130년이나 된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통과한 환란과 시험이 얼마나 되며, 신앙을 위하여 겪은 험악한 삶의 경험이 얼마나 되는가? 사실 신앙을 위하여 겪은 험악한 삶의 경험은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과 關聯(관련)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信仰生活을 안일(安逸)하게 해 왔다는 말이 된다.
⑶ 야곱은 신앙을 위하여 겪은 험악한 삶의 경험을 130년 동안 비축(備蓄)해 놓고도 이 세월은 조상들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야곱에게서 두 가지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첫째는 야곱의 조상들로 표현된 아브라함이나 이삭도 이 세상에 대해서 영존처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그네의 자세로만 살았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 실제로 아브라함도 이삭도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그러고 보면 야곱이 이 세상에 대해서 나그네로서 초연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조상들에게서 계승한 신앙의 자세임이 틀림없다.
둘째는, 야곱은 자기가 살아온 나그네 길이 조상들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앞으로 더 남은 나그네 길에 대해서 어떠한 험악(險惡)한 환경(環經)이 동원(動員)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통과할 굳은 결심이 준비(準備)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야곱은 이 말을 한 후에도 이집트에서 17년을 더 살았고 그래서 147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남은 그에 생애에서 험악한 삶을 살지 않았다. 이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고난은 준비하고 있으면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통과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셋째, 11-12절을 보면 요셉이 7년 동안에 비축(備蓄)해 둔 곡물(穀物)로 부모형제(父母兄弟)들을 공궤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영적 신앙의 두 거물이 쌓아올린 신앙생활의 업적임을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 첫째는 야곱이 쌓아 올린 신앙의 업적이며, 둘째는 요셉이 쌓아 올린 신앙의 업적이다. 이 두 사람이 쌓아 올린 신앙의 업적은 야곱의 가족(家族) 식구(食口) 70명의 생명까지 살리고도 남았다. 실로 다른 사람들은 굶어도 야곱의 가족만큼은 굶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은 곡물을 구입하기가 어려워도 야곱의 가족만큼은 어렵지 않다. 실로 이것은 신앙의 두 거물인 야곱과 요셉의 덕(德)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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