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화목제의 희생 제물이 되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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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5-05-03 20:40본문
레위기 강해(8) 레 3:1~5절
화목제의 희생 제물이 되라.1.
소로 드리는 화목제
레 3:1~5“만일 그 사람의 헌물이 화목제의 희생제물이고 그가 수컷이든 암컷이든 간에 그것을 소떼에서 취한 것이면 그는 흠 없는 것을 주께 드릴지니 2그는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중의 성막 문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들인 아론의 아들들이 제단 위 사면에다 피를 뿌릴지니라. 3그는 화목제의 희생제물 중에서 주께 불로 드리는 제사를 드릴 것이며 내장을 덮고 있는 기름과 내장 위의 모든 기름과 4옆구리에 붙은 두 콩팥과 그 위에 있는 기름과 간 위의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 내고 5아론의 아들들은 그것을 제단 위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번제희생으로 불사를지니라. 그것이 주께 불로 드리는 제사요, 주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아멘.
지금까지 우리는 번제(1장)와 음식제사‘소제’(2장)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해 왔다. 오늘부터 레 3장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린다. 오늘 레 3장에서 화목제의 희생제물 및 그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하나님은 가르쳐 주셨다. 여기 화목제 역시 번제와 동일하게 소(1~5절), 양(6~11), 염소(12~17)의 제물로 구분되어 드려졌다. 그렇지만 이 화목제 제물들은 헌제자(獻帝者)의 몫이 없었던 번제와는 달리 제사 후 제사장과 헌제자의 공동 몫이 되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친교의 성격이 강하다.
이 화목제 제사는 성격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나누어져 있다. 곧,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감사제(레 7:15), 서원을 이루기 위해 서원이 성취되었을 때 드리는 서원제(레 7:16), 따라서 장막 건립시 자발적으로 예물을 드린 것처럼(출 35:5, 21) 자진하여 드리는 자원제(레 7:16), 즉 낙헌제(레 22:18)가 그것이다. 한편 이러한 화목제는 제사의 순서상 죄를 속하는 속죄제, 전적인 헌신을 다짐하는 번제, 충성과 정결의 표현인 음식제사에 이어 가장 마지막에 드려진 제사로서, 곧 죄사함을 받고 헌신과 졍결의 삶을 다짐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기쁨 중 교제하는 축제의 제사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구약의 제사는 한낱 제사로 끝나는 그런 제사가 아니었다. 구약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사람들이 나아갔듯이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구약의 제사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리켜 주고 있다. 요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은 아무도 없느니라’. 하셨다.
위에서 서론적으로 언급해 드렸듯이 모든 제사법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깊은 뜻이 들어 있다. 우리가 구약 말씀 속에 제사들을 보면서 우리가 무심히 읽고 알고만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 제사법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이를 통하여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어떤 신앙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도 여기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지키라고 구약의 제사법을 주신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의 제사법대로 행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사의 실체가 나타나셨으므로 우리는 모형적으로 보여 주신 제사 방법을 따를 수 없다.
하지만 제사 방법은 따를 수 없다 할지라도 제사법 속에 원래 주신 하나님의 깊은 뜻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제사는 화목제이다. 하나님은 인간들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화목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가지지 못하고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신앙생활 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성도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화목 제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한 관계가 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모두 하나님 제단에 화목 제물들이 되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함.
첫째: 자원하여 예물을 드려야 한다
레 3:1 ‘만일 그 사람의 헌물이 화목제의 희생제물이고 그가 수컷이든 암컷이든 간에 그것을 소떼에서 취한 것이면 그는 흠 없는 것을 주께 드릴지니’ 레 3:6 ‘만일 주께 드릴 화목제의 희생을 위한 그의 제물이 수컷이든 암컷이든 간에 양떼에서 취한 것이면 그는 흠 없는 것을 드릴 것이며’ 레 3:12 ‘만일 그의 제물이 염소이면 그는 주 앞에 그것을 드릴지니라.’
여기서 자원하여 예물을 드려야 하는 것은 화목제의 희생을 말한다. 레 3:1에 ‘만일 그 사람의 헌물이 화목제의 희생제물이고’ 라고 했다. 여기서 히=>(זֶבַח שֶׁלֶם ים 제바흐 쉘라밈). 여기 ‘제바흐’는 ‘죽이다’란 동사 ‘자바흐’에서 팡생된 말로 ‘희생제물이 될 짐승’을 가리키고, ‘쉘라밈’은 ‘온전해지다’, ‘해를 받지 않다’란 뜻의 동사 ‘살렘’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에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또는 주께서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기 우해 드려지는 희생제를 가리키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도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고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하여 마지막 날에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화목 교리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화목제 제사는 짐승을 드리는 피의 제사인데, 제물은 소, 양, 염소 세 가지만 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하나님 제물로는 반드시 수컷이어야만 했는데 암컷도 사용하도록 허락하고 계신다. 그러나 흠만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이러한 화목 제사에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숨겨져 있다.
여기서 이해를 돕는다면 화목제 = "제바흐 쉘라밈" (히) 이 뜻은 "화평의 희생제. 친교의 희생제" 수컷이나 암컷이나 =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이루는데 있어서는 남여 노소 빈부귀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흠 없는 것으로 =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만이 흠이 없다. 인간 스스로는 화목제의 희생제물이 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되어질 때 화목 재의 희생제물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 드릴지니’ 이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희생제물이 되어야 한다.
또한 번제와 마찬가지로 화목제도 짐승을 죽여 피를 흘리고 번 제단에 불로 태워 드리는 화제였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는 불로 태워서 드리는 화제였다. 이것은 곧 우리의 모든 예배가 오직 성령의 인도와 주관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예표이다. 이러한 화목 제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가?
요일 4:10‘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을 우리 죄들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라’. 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악의 담장이 가로막혀 있었다. 그런데 이 죄악의 담을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 되시므로 허물어진 것이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갖느니라’ 고 했다. 우리는 스스로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없다. 스스로는 화목 제물도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 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화목제물까지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 이 시대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과 혼돈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불안 속에서 살고 있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니까 생활 속에서 기쁨이 없고 기쁨이 없다 보니 여러 가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그로 인해서 여러 가지 질병을 가져오게 한다. 왜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혼란스러워할까요? 한 마디로 마음이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 마음의 화평이 사람이 갖고 싶다고 해서 가져질까요? 인간 스스로는 마음의 화평을 가질 수 없다. 사람들은 마음의 화평을 갖기 위해서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하면서 몸부림을 쳐 보지만 그러한 수단과 방법은 잠깐뿐이다.
그래서 다시 사람들의 마음은 또 불안하고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 하루를 살다 죽더라도 마음 편하게 살다 죽으면 좋겠다고 한다. 세상은 갈수록 우리에게 불안한 소식과 초조함을 가져다줄 뿐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마음의 화평을 누리고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우리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 것은 모두 죄 때문에 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죄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과 멀어진 사이가 될 때 사람들의 마음은 평강을 잃고 불안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에게 해결책은 하나님과의 화해이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질 때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 14:27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남겨 두나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화평이 계속 지속되지 못할까요?. 기도드릴 때만 잠간 평강이 임하고 .......말씀 볼 때.... 찬양 드릴 때 ...... 예배드릴 때는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 것 같은데 금방 마음이 심란해지고 어두워졌다면, 왜 그럴까요?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그 원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앞에 화목제물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여러분! 여기 소. 양. 염소. 세 가지 제물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1. 제물은 흠 없는 소·양·염소의 수컷과 암컷이어야 한다.
레 3:1 ‘그가 수컷이든 암컷이든 간에 그것을 소떼에서 취한 것이면 그는 흠 없는 것을 주께 드릴지니’ 라고 했다. 여기서 번제에 합당한 제물은 숫 소와 수양(염소)과 비둘기 종류로 제한하고 있다. 그렇지만 화목제에는 비둘기는 제외되었지만, 암컷은 허용되었다. 비둘기가 제외된 것은 화목제의 기본 요소인 기름을 비둘기에서는 얻을 수 없고 비둘기는 남성 대명사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화목제물에서는 성의 선택이 자유롭다. 그 이유는 번제를 드리는 것은 경외의 표현으로 우리의 힘과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이며, 화목제는 하나님과 제사장 그리고 제물을 드리는 자가 분배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목제는 친교의 축제이고, 제물의 성의 구별을 두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있지 않다(갈 3:28). 또한 예수님은 성의 차별없이 모든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화목제물이시다. 아멘.
세 가지의 소·양·염소 중에서 소는 잠 14:4‘수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고 했다. 소는 힘이 강하다. 그래서 소는 충성스러운 짐승이라는 것을 번제 제사 때 살펴보았다. 즉 충성스러운 힘 있는 신앙으로 제단을 섬길 때 화목제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믿음이 약한 자는 양, 염소의 화목제물로 충성하므로 화목제물이 될 수 있다.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다. 그 믿음의 분량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교회에 내 믿음의 분량대로 충성했을 때 그 마음에 평강이 오는 것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이 평강은 저 세상에서 느껴볼 수 없는 평강이다. 이 평강은 바로 내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2. 화목 제물인 양
앞서 우리는 양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양은 희생를 의미한다. 희생 없이 얻어지는 없는 것이 세상 이치다. 영적 세계에서도 자신이 희생하지 않고 화목한 관계만 이루어지길 원한다면 이는 어리석고 무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하셨기 때문에 화목 제물이 되셨듯이 우리 또한 교회를 위해서 희생해야만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화목 제물이 된다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 화목제물인 염소
염소에 관해서 앞서 살펴보았다. 여기서 염소의 특징은 앞서가는 짐승이다. 렘 50:8 ‘양떼들에 앞서 가는 숫염소같이 되라’. 하셨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앞장 서가는 자가 될 때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되고 제단에 화목 제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앞뒤를 주저하지 않고 앞서가는 분이셨다.
애청자 여러분! 성도의 최고의 신앙은 제단에 제물이 되는 것이다. 살고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죽고자 예수를 믿는 자는 강하면서도 희생자가 되어야 한다. 마16:25~26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얻고자 하면 생명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으면 얻으리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자기 혼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고 하셨다.
둘째는 화목제 제물을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레 3:2~5절 ‘그는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중의 성막 문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들인 아론의 아들들이 제단 위 사면에다 피를 뿌릴지니라. 3그는 화목제의 희생제물 중에서 주께 불로 드리는 제사를 드릴 것이며 내장을 덮고 있는 기름과 내장 위의 모든 기름과 4옆구리에 붙은 두 콩팥과 그 위에 있는 기름과 간 위의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 내고 5아론의 아들들은 그것을 제단 위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번제희생으로 불사를지니라. 그것이 주께 불로 드리는 제사요, 주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아멘.
먼저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중의 성막 문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들인 아론의 아들들이 제단 위 사면에다 피를 뿌릴지니라. 그리고 제단 위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번제희생으로 불사를지니라. 그것이 주께 불로 드리는 제사요 주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하셨다. 여기서 소·양·염소의 수컷이나 암컷 가운데 흠없는 것으로 선별하여 그 제물 위에 안수하고 회중의 성막 문 앞에서 잡았다. 제물의 어리 위에 안수하는 것은 다섯 가지의 의미가 있다.
1. 고백의 의미가 있다 : ⑴ 자신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 ⑵ 그리스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죄인임을 고백, ⑶ 형벌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고백, ⑷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심을 고백한다는 의미가 있다.
2. 받아드림의 의미가 있다 : 그 제물이 현재 자신을 위해 드리는 것임을 시인하는 의미가 있다. 3. 전가의 의미가 있다: 전가 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4. 헌제자와 제물이 한나로 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제물이 죽을 때 자신도 함께 죽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셋째는 회중의 성막 문 앞에서 잡았다.
2절에 ‘회중의 성막 문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라고 했다. 희생 짐승의 도살 장소는 번제단 북편 뜰이었다(레 1:11). 이곳을 통상 회중의 성막과 문 앞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주의 지상임재 ‘성소 앞’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중의 성막 문’은 양의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성막의 문은 오직 하나뿐이다. 구원의 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구원의 문이시다.
요 10:7~10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들의 문이라. 8내 앞에 온 자는 다 도둑들이요 강도들이라. 양들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나는 그 문이라.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받을 것이며 또 들어가며 나오며 초장을 찾으리라. 10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살인하며 멸망시키려고 오지만,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아멘.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화목제 제물이 되었으면 하는데 그러한 신앙인이 없다.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 제물 드리는 방법을 몰라서 화목 제물이 되지 못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제물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 또한 중요하다. 번제, 소제, 화목제에서 거듭 강조되는 말씀 중에 하나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말씀이다. 우리가 수고하고도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지 못한다면 헛수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목제 드리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화목제 드리는 방법을 7가지로 가르쳐 드린다면 1. 회중의 성막 문 앞에서 잡으라는 것이다. = 장소 (곧 교회), 2. 피를 제단 위 사면에다 뿌릴지니라 = 충성심, 3. 기름은 = 성령을 가리키고, 4. 제단 위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번제희생으로 불사를지니라 = 성령 충만함. 5. 그 가슴을 주 앞에 흔드는 제사로 흔들지니라(레 7:30). = 좌우로 흔드는 것을 요제라고 한다. 이렇게 드린 것은 제사장과 그 가족들 것으로 화목을 이루라는 것이다.
6. 오른쪽 앞다리를 들어올리는 재물로 제상장에게로 줄지니라(레 7:32) = 들어 올리는 제물 이것은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 몫이라고 했다, 7. 제물 중 남은 부분을 잘 처리해야 한다 (레 7:15-21) = 드린 제물은 이제 하나님의 것이므로 거룩한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화목제의 제물은 이미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께 드린 제사이다. 그러나 이 시대 과연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사람들끼리도 불편한 관계가 되면 대화가 끓기고 인상만 쓰게 되는데 우리가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라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성도들이 교회 다니다가 왜 교회와 목사와 성도들끼리 불편한 관계가 되는가 화목 제물 드리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불편한 관계가 되고 있는 것이다. 화목제의 제물을 어떻게 드려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제단에 온전한 화목제의 제물이 될 수 있겠는가?
1. 화목제 희생제물은 회중의 성막 문 앞에 잡아라
이 말은 교회 안에서 제물을 죽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 앞에서 죽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우리 또한 내가 섬기는 제단에서 죽어야만 한다. 불로드리는 제사가 내 자신을 위해서 죽는 제사였다면 화목제의 희생제물은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서 내가 죽는 것이다. 이 나라가 화평한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면 성도들이 교회에서부터 죽어질 때 화목함이 나타날 것이다.
가정이 화목해지기 원한다면 내 자신이 먼저 교회 제단 앞에서 죽어질 때 가정은 화목한 가정이 되는 것이다. 그 제물 머리에 안수하고 회중의 성막 문 앞에서 잡으라고 했다. 내 자신의 죄를 온전히 고백하고 주님 앞에 죽으라는 것이다. 아무리 다른 데서 수백 번 죽어도 소용없다. 교회 제단 앞에서 내 자신이 죽어야 한다. 주님 앞에서 죽어질 때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임하게 된다.
2. 피를 제단 위 사면에다 뿌릴지니라
피는 생명을 뜻한다. 피를 제단 위 사면에다 뿌리라는 것은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머리에 가시관 쓰고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는 창이 배를 찔렀다. 머리서부터 발끝에서부터 예수님 몸 속에 있는 피는 다 쏟으셨다. 하나님 제단 위 사면다 예수님 자신의 온 몸에 피를 뿌리셨다. 완전한 충성의 모습이다.
여러분 이러한 충성이 있어야 한다. 내 몸의 피를 뿌리는 충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너무 심한 소리 아니냐?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제단 위 사면에다 피를 뿌리는 충성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모습이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보여드려야 한다 교회 제단을 떠나서 하나님과 화목 되는 길이 있다고 보세요? 예수를 떠나서 하나님과 화목 되는 길이 있다고 보시나요?
3. 기름은 주의 것이라고 하셨다
제물 속에 덮인 기름만 골라서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기름은 성령을 뜻하므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화목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을 인도 받으면 제단에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갈 5:17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며 성령은 육신을 거스리나니, 이들은 서로 반목하여서 너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느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러나 제단 앞에서 내가 죽고 .....제단 사면에 피를 쏟는 충성을 보인다면 주의 성령은 우리를 온전히 인도하게 될 것이다 우리를 미혹하는 소리가 난무하는 마지막 때에 우리는 더욱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야 할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우리는 악령의 인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5. 가슴을 주 앞에 흔드는 제사로 흔들지니라
레 7:30 말씀을 보면? ‘주께 불로 드리는 제사는 자기 손으로 가져오되 가슴과 함께 그 기름을 가져오고 그가 그것을 가져와서 그 가슴을 주 앞에 흔드는 제사로 흔들지니라’. 하셨다.
개역 성경을 보면 흔든다는 것을 요제(搖祭)라고 했다. 한자로 요(搖)흔들요, 제(祭)제사제, 사용한다. 히=>요제란 (תְּנוּפָה 테누파)라고 하는데 이는 흔드는 제물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제물을 주님 앞에 흔들어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화목제의 경우에는 제물의 가슴 부위를 흔들어 주님께 드린 후 그 제물은 제사장의 음식으로 드렸다. 여기서 가슴은 애정을 나타내는 동시에 흔드는 것은 움직이는 감동을 뜻한다. 아울러 제사장의 심정은 항상 성령에 의해 감동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감동되지 않는 심정이라면 죽은 자이다. 제사장은 언제나 성령의 감동을 받아 활동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화목제는 하나님과도 화목한 관계를 뜻하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화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흔들어 드리는 가슴 부위를 불에 태우지 않고 그슬려서 제사장과 그 자손들에게 돌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백성들과 제사장 간의 화목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사장은 오늘날 교회의 담임 목사이다. 여러분이 화목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목사에게 가장 좋은 것을 드릴 수 있는 자가 될 때 화목 제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제물의 가슴 부위라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맛있는 부위이다. 또 가슴 부위는 짐승의 한 중간이다 가장 좋은 것으로 주의 종을 섬길 때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되고 화목 제물이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되었는데 가정이 화목해진다. 일터에도 화목해진다. 운영하고 있는 기업도 화목해진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면 교회 또한 화목한 역사이다. 감동의 역사이다. 주의 종들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어도 하늘에서 기억한다고 했는데 하물며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성도가 되는데 어찌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안 되겠는가?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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