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 1월 넷째 주일「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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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3-01-23 07:19본문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면...”
저는 남원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온 마을이 떠들썩하도록 유명한 소년으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대나무 뿌리로 때려가며 억지로 공부를 하도록 했던 큰 형님이 군대를 가서 그때부터는 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시험을 쳐서 고등학교를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제가 가까운 전주로 고등학교를 가야 되는데 후기도 아닌 전기 때부터 군산제일고를 들어갔습니다. 물론 그때 군산제일고는 전라북도에서 굉장히 뜨는 학교였습니다.
원래 군산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은 영명고등학교였는데 고판남 회장님께서 학교를 인수하셔서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유망한 학생들을 모집한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학교에 입학을 해서 저의 가정과 전혀 관계가 없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소명을 받고 신학교를 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전혀 몰랐는데 먼 훗날에서야 제 모교를 전킨 선교사가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12월 3일 한국에 선교사로 도착을 했습니다. 서울에서 10개월간 한국어 공부를 한 후에 전라도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가자마자 그는 노방전도를 하고 축호전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전도를 하다가 급류에 빠져 죽을 뻔하기도 하고 연탄가스 중독으로 쓰러지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막에서 밤에는 모기나 빈대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온갖 고생을 감내하면서 호남지방에 선교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는 군산에서 선교를 하고자 군산포구에 거처를 정하고 전도로 결실을 얻은 몇 명의 교인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곳이 바로 군산 구암교회와 개복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의 모교를 세운 것입니다.
그의 열정은 군산 지방의 선교로만 국한하지 않고 옥구, 익산, 김제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마침내 풍토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자신만 풍토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세 아들을 낳았는데 세 아들 모두 풍토병에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향하여 절망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고백을 하며 감사했다고 합니다. “선교사가 풍토병에 걸린 것은 선교사의 영광이고 특권입니다. 그리고 자녀 셋을 다 잃은 것도 시험이 아니라 시련일 뿐입니다. 이것은 재앙이 아니라 선교사의 영광 중의 영광이고 사명자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선교사가 하늘에 쌓은 상급과 면류관이 더 많아지고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킨 선교사가 풍토병이 걸린 병든 몸으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선교를 하자, 전라도 지역 선교사들이 회의를 해서 이분을 강제로 사역지를 전주서문교회로 옮겨 버렸습니다. 당시 전주서문교회는 제법 부흥이 되어 있어서 교회가 안정적이고 자립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킨 선교사로 하여금 20리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못하도록 선교사들이 결의를 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전킨 선교사님은 다시 몸이 근질근질해서 전주서문교회를 재건축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정한 20리 밖을 나가서 여섯 교회를 개척하고 고아원까지 설립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07년 12월 마침내 그는 풍토병으로 인한 급성 폐렴이 찾아와서 몸져눕게 되었고 1908년 1월 2일 43세의 젊은 나이로 땅에 묻히고 맙니다.
저의 삶이 어찌 전킨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분명한 것은 젊은 시절부터 전킨의 영성과 스피릿이 제 안에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학교를 간다고 집에서 쫓겨나던 일, 백암교회를 개척하던 일, 가락동에서 몸부림치던 야성의 나날, 분당과 죽전까지 이어지는 폭풍의 질주, 성대를 두 번이나 수술하던 일 등 일련의 사건들이 그걸 증명한다고 할 수있겠지요. 이걸 칼 융의 집단 무의식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니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킨이 뿌린 열매를 하나님이 거두셨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전킨은 43세에 죽었잖아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전킨 선교사님께서 자기가 세운 학교 출신인 소 목사가 지금의 사역을 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까. 어쩌면 나도 전킨처럼 43세의 나이에 죽었다면 더 순수하고 더 깨끗하고 더 맑은 영혼으로 천국에 갔을 텐데... 전킨과 나를 비교해 본다면 43세 이후부터의 삶은 덤으로 살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43세 이전의 맑은 영혼을 그대로갖고 있을까. 43세 이전에 그 순수함이 나에게는 얼마나 가득 배어 있을까.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면 하루하루가 더없이 소중할 텐데... 불붙는 소명감뿐만 아니라 더 깨끗한 영혼으로 주를 섬기고 목양일념에 빠져 살아야지.” 전킨이 세운 학교를 나왔기에 전킨 같은 삶을 살아야 하고, 그것도 덤으로 사는 삶이라면 더욱더 전킨의 스피릿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부담감이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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