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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일메시지 기도의 사람이 되자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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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6-04-05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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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사람이 되자 [12]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

 

언론인 정기남 목사(국장).jpg

개역개정) 삼상 1:2~3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3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아멘.

 

오늘 말씀의 팩트는

손에 잡힐 듯 그러나 손에는 아무것도 없어 앞서 엘가나의 화려한 과거를 드러내는 족보임에도 불구하고 불임으로 끝맺게 되는 내용을 소개하였던 저자는 이제 그의 집안의 실제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자식이 없는 한나와 여러 자식을 두고 있는 브닌나입니다. 마치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였으나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고, 총이 없었던 레아에게는 자식이 있는 상황과 같습니다.

 

엘가나 또한 자식이 없는 한나를 더욱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정은 드라마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장희빈이라는 사극에서도 이와 유사한 설정입니다. 비록 왕의 총애를 받기는 하지만 자식을 낳지 못함으로 후궁인 장희빈으로부터 온갖 어려움을 당하는 인현왕후가 그렇습니다. 두 명의 아내, 사랑을 받고 있는 아내는 자식이 없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아내는 자식이 있습니다.

 

무언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손에 잡히는 것은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소생이 있으면 그 아이에게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으련만 더 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무언가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상황에 대한 묘사를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이집트를 떠나게 하신 하나님은,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광야에서의 40년을 지키심으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거민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사로잡히도록 인도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에게는 미래에 보이질 않습니다. 과거로는 할 이야기가 많지만 정작 내일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소망이 보이지 않는 지경입니다. 마치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 과거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경험을 들을 때면, 또한 설교를 통하여, 간증을 통하여 그들 가운데 역사 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면 분명히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 하심을 인정하겠건만 나의 삶에 있어 하나님에 대해 고백할 것이 없으며 더욱이 내일에 대한 비전과 꿈이 보이질 않는 형국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언가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손에 쥔 것이 없는 바로 그 장면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배드림이 슬픔이 됩니다. 그 실제적인 갈등이 표출됩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림으로 기쁨이 넘쳐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드릴 때마다 오히려 마음의 상함을 당하는 한나의 경우를 보게 됩니다. 분명히 남편의 사랑을 독점하다시피 하지만 그 사랑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친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 현실에도 많은 어려움을 주긴 합니다만 그 당시에는 더 심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형편 가운데 한나는 남편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러 실로에 올라갈 때마다 함께 하였습니다. 이때 이들이 올라가 드린 제사는 화목 제였습니다. 이때의 제사가 화목 제였음은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난 뒤 그 분깃을 나누어 갖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달리 화목제의 경우에만 제물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이 하나님 앞에 화목제 곧 온 가족들이 함께하는 기쁨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 후 엘가나는 사람별로 그 분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의 시간이 한나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이유는 분깃에 따라 나누는 고기를 볼 때마다 자신에게 자식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여럿이 있어 분깃을 나눌 때 많은 양을 갖지만 한나는 홀로이기에 한 몫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 개역 성경에서는 5절에 한나에게 갑절을 준 것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만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해 놓은 70인역에서는 "그러나 한나에게는 그를 사랑하면서도 한몫밖에 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manah() ahat(하나) appaim(얼굴) ki(왜냐하면)로 되어 있어서 이를 번역하면 '왜냐하면 얼굴 하나의 몫'이 됩니다.

 

아마도 여기에서 얼굴이란 단어를 영광이란 측면에서 갑절로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전체 문맥의 흐름상 갑절보다는 하나라는 의미가 더 적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시간이 예배 시간이었기에 한나는 오히려 예배로 인해 고통이 증가되었습니다. 더더욱 자식이 있으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브닌나 마저 격동케 하였으니 한나에게 있어서 예배드림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그의 아픔이 위로받고, 상처가 치유되며, 슬픔이 삭여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경우에는 그녀의 아픔을 가장 확대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남편이 자원해서 드리는 화목제의 즐거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한나의 마음이 이처럼 괴로웠던 것은 결코 우리의 현실과 무관한 이야기 아닙니다. 사실 오늘날도 이런 일이 공공연히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지 않은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상처받기 쉽고, 남들에게 상처주기 쉬운 곳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한다고 모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라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을 너무도 슬프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떠나는 많은 이들의 경우 사실은 교회에서 주어지는 상처로 인해 떠나는 이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남편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다 하여도 성경은 분명히 브닌나에 비해 한나가 남편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남편의 사랑을 받는다 하여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는 남편의 사랑이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예배 후 마음의 아픔으로 인해 기쁨의 식탁에 동참하지 못하는 한나에게 남편 엘가나는 그대에게 열 아들이 있는 것보다 자신이 낫지 않냐고 말하며 한나로 하여금 식탁의 자리에 참여하도록 권하며 위로합니다. 이에 한나는 식탁의 자리에 앉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이 기쁨의 식탁이 한나의 마음을 온전히 위로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한나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하였고, 고통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진정한 행복은 이처럼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 세상의 것이 다 그렇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고 오히려 더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맙니다. 그것이 행복의 원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만족을 누리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을 쏟아놓을 것인가? 술을 부어 넣을 것인가? 이제 온 가족이 함께 화목제물로 기쁨을 나눌 때 한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빠져나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놓고 흐느껴 울며 기도합니다. 그녀의 기도는 아들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아들을 달라고 하지 않고 아들을 주실 때 그 아들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려드릴 것임을 서원하며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는 말 그대로 애절한 여인의 신음 섞인 기도였습니다. 성경의 그 어느 책보다도 여호와의 절대적인 주권을 부각시키는 사무엘서 안에서 한나가 이렇게 끈질기고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여호와의 주권을 너무 의지한 나머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간절한 기도를 별로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수록 더 결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 것입니다.

 

한나가 이처럼 하나님께만 매달릴 수 있음은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한나는 자기의 마음을 격동케 하는 브닌나를 향하여 다툼이나 불평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향해서도 원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를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녀에게 아이가 없자 그녀는 자신의 종이었던 하갈을 남편에게 들여보내 자식을 갖게끔 합니다. 그런데 실제 하갈이 임신을 하고 자기를 업신여기자 남편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녀를 내어쫓게 만듭니다.

 

이후 사라 자신이 이삭을 낳았을 때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자 이때도 아브라함에게 불평하여 이들을 내어쫓습니다. 이처럼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십니까? 모든 일의 주권을 소유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우리의 발걸음은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하소연을 하거나 불평하기보다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처럼 자신의 처지로 인해 마음을 쏟아 놓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토해 놓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문제의 해결점은 자신의 속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제사장 엘리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여인 한나를 술 취했냐고 힐문하며 책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엘리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나는 지금 화목제의 잔치에 참석하였기 때문입니다. 잔치에서 포도주를 마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는 말씀의 의미를 느낄 정도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고 있는 여인에게 술에 취했냐고 힐문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세상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극한 슬픔과 아픔이 주어질 때 그것을 해결하고자 술을 들여 붓습니다. 곧 밖에서 안으로 채워 가는 것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힘들고 지칠 때 사람들은 술을 쏟아붓는(마시는) 것으로 해결하려 하지만 이는 문제를 증폭시킬 뿐임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 그것은 바로 여호와 앞에 마음을 쏟아 놓을 때에만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헌신! 그것은 하나님의 것, 이제 아들을 낳은 한나는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이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는 '여호와께 구하여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구하여 구한 바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 한나는 그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있습니다.

 

여기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고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는 것은 나실인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나실인은 평생이라기보다는 일정한 기간동안 감당합니다. 하지만 여기 사무엘은 평생에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 돌려 드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만물이 주로 말미암았고 주께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렇기에 헌신은 하나님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자칫 헌신을 나의 것으로 여기게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까지 했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나에게 해주신 게 뭐야!" 하며 원망합니다. "내가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였는데 나를 알아주지도 않아!" 하며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결코 헌신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구하는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도용하여 자기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구함 가운데 상당수가 지나치게 나 중심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기억하십시오. 헌신은 내가 나의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바 된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에 극한 아픔이나 슬픔을 갖게 될 때 술을 부어 넣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에 나의 영광과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포장된 어리석은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삶! 그 삶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무릎을 꿇고 자기의 마음을 온전히 쏟아놓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쳐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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