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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소강석 목사 11월 셋째 주일 목양칼럼 『바로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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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작성일 19-11-1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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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 11월 셋째 주일 목양칼럼

바로 그 사람

제13회 해언 기념강좌2.jpg

    

 저는 지난 수요일 오전 광신대학교에 가서 제13회 해원 기념강좌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 주간에는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인천낙원제일교회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최병현 담임목사님께서 배려해 주셔서 수요일 오전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해원은 고 정규오 목사님의 호인데요, 정 목사님은 저의 은사로 광신대학교 초대 총장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 분을 지방신학교 총장이요, 군소교단의 지도자로만 아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 교단의 신학과 영성의 근간을 이루었던 분입니다.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로 인해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조선신학교가 서울에서 개교 하였습니다. 이때 조선신학교는 김재준 박사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재준 박사는 문서설을 비롯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신학생 정규오는 ‘51인 신앙동지회를 결성합니다. 그때 저의 믿음의 아버지였던 박종삼 목사님도 51인 가운데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51인 신앙동지회는 1947418일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33회 총회 때 조선신학교 교수들의 신학사상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박형용 박사가 교장으로 있고 보수신학의 산실이었던 고려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위대한 신학자 박형용 박사를 잘 보좌하고 보수신학을 지키며 세우는데 한 중심에 있었고 실제적으로 총회의 정치적 실세로 성장합니다.

 

제13회 해언 기념감사1.jpg

 

 그런데 그에게 천적이 생겼습니다. 바로 이영수 목사님입니다. 그는 탁월한 혜안과 리더십을 발휘하여 총신대와 총회회관을 건립하는데 가장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 할 때 해원은 신앙 양심과 선지자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 반대를 하였습니다. 반면 이영수 목사는 3선 개헌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영수 목사는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다보니 교단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래서 해원은 점점 정치적으로 밀리며 대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79년 대구총회에서 이영수 목사의 정치적 실력에 밀려 정규오 목사와 그의 사단들은 입장도 못한 것입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참았으면 좋았을텐데 참지 못하고 교단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측 교단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1982년 합동 교단 정화위원회가 태동하여 이영수목사와 그의 사단을 몰락시키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때 조금만 참고 분리 하지 않았다면 정규오 목사님의 신학과 자산은 더 넓은 바다에서 한 마리의 고래처럼 유영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교단을 분리해 서울에는 개신원을 세우고 광신대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개혁교단은 굉장한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정규오 목사님 인생 황혼기에 개혁측과 합동측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당시 서기행 목사님이 부총회장이 되자, 정규오 목사님은 서부총회장님을 광주 무등산으로 불러서 눈물로 애원했다고 합니다. “자네가, 부총회장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네. 총회장이 되면 개혁과 합동이 합치는 일을 하소. 개혁과 합동이 합치는 것을 봐야 내가 눈을 감고 천국 갈 수 있겠네.” 그래서 마침내 서기행 목사님은 정규오 목사님의 눈물의 부탁을 받고 개혁과 합동이 합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개혁의 첫 열매로 부총회장 단독후보가 되고 무투표로 취임을 하였습니다.

 

제13회 해언 기념강좌3.jpg

 

 저는 이런 내용의 발표를 하였습니다. 저는 해원 정규오 목사님의 수제자이거나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저를 특별하게 거두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섭섭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분의 가르침을 받고 신학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수혜자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계실 때는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떠난 후에야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해원의 신학과 업적을 기억만 할 것이 아니라 확장해 가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지방에서만 기념대회를 하지 말고 수도권으로도 확장하고, 전 교단으로 확장하고, 세계화를 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렇게 대단하구나. 어쩌면 그 분은 살아서보다는 죽음 이후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분일거야. 또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제자들의 책무가 아니겠는가.”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떠난 후에 더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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