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한계시록 7장 강해(48) 대환란을 왜 7년으로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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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작성일 19-10-15 21:24본문
요한계시록 7장 강해(48)
대환란을 왜 7년으로 보는가?
지난호에 이어
또 다른 잘못된 부류는 계시록을 전부 원어를 인용하여 푸는데 실제로 주님이 재림하시는 내용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유ㆍ상징으로 풀이한 내용에 따르면 그들에게는 이미 주님이 오셨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근거로 요14:16 과 요일2:1에 똑같은 원어‘파라크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를 내세우면서 예수님이 재림한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신 것을 예수님이 재림했다는 것으로 간주해 버렸고, 이미 재림한 예수가 누구누구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요14:16에 “내가 다른 보혜사(파라크레토스)를 보낸다.”고 말씀하신 ‘다른 보혜사’(파라크레토스)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요일2:1에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있는 한 변호인(파라크레토스)이 있으니, 곧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신 ‘변호인’(파라크레토스)은 하나의 직무를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를 짓거나 잘못을 했을 때,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옹호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신데 그러한 예수님의 직무를 표현한 것입니다. ‘파라크레토스’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파라’(~옆에서)와 ‘크레토스’(변호하고, 보증하고, 위로해 주는 분)가 합쳐진 복합어로서, 요14:16절의 ‘파라크레토스’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보혜사로 계시다가 부활 승천하신 후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비유는 실제의 될 일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비유가 아닙니다. 실존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비유로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재림이 장차 실제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는 흰 옷 입은 큰 무리’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먼저 흰 옷을 입은 것은 계6:9-11에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죽임당한 자들에게 긴 흰 옷을 입혀주시면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또 순교한 자들이 계19:6-9에 흰 세마포를 입고 어린양의 혼인식에 그의 신부로 청함을 받습니다.
순교한 자들에게 입혀준 흰 옷은 결국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과 일치되고 있는 것이 계시록입니다. 13-14절에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대환란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옷을 씻어 어린양의 피로 희게 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13-14절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기들의 죄를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희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옷을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흰 옷을 입게 된 자들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린양이 피 흘린 제물 되심과 똑같이 순교 제물로 세워진 것이 곧 흰 옷 입은 것입니다. 순교하는 자들은 많은 세월에 걸쳐 연단을 받고 순교자로 확정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고 그리스도의 것이 된 후에 산 제물 되는 과정을 거쳐 제물 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생명으로 살게 됐으니 곧 순교자의 신앙까지 올려져 결국 순교할 자의 명부에 녹명된 것입니다. 순교자로 확정되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100% 순교시키심으로써 완성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6장11절의 순교한 자들과 7장9절의 흰 옷을 입은 큰 무리는 같은 순교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순교한 후에 하늘나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와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찬양하는 광경이 계7:9절입니다. 종려나무에 관한 언급은 구약의 여리고성을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불렀습니다(신34:3). 이는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이 모든 면에서 약체인 이스라엘이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성을 함락시켜 승리한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를 환호하며 맞이했습니다. 그날을 종려주일이라 함은 주의 영광과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본문에 흰 옷을 입은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양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승리시켜 주신 것과 영광을 받게 해주신 것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10절) 큰 음성으로 소리질러 말하기를 “구원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하더라. 9절에 바로 이어서 큰 소리로 외치며 찬양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앞으로 이렇게 하게 될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가 하늘나라 하나님과 어린양 앞에서 큰 소리로 “이 구원이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하고 찬송할까요? 이는 흰 옷을 입은 자 즉 순교한 이들이 자신들의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양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미 깨닫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이 찬송하는 ‘구원’은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은 구원뿐만이 아닙니다. 또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그리스도께 속한 자, 하늘에 속한 자로 사는 구원만도 아닙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이 대환란에서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 말씀으로 인하여 순교를 당한 후 하늘나라에서 받게 되는 영광이 그들의 구원인 것입니다.
먼저 흰 옷을 입은 무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순교한 자신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잘 알고 체험한 내용을 가지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흰 옷을 입은 무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들을 낳으신 친아버지이시요, 자신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친아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낳으실 때 대책 없이 낳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입혀줄 영광, 즉 영원히 아들과 아버지가 기쁘게 살아가게 될 영생의 기업을 마련해 놓으시고 그 예비해 놓으신 하늘의 기업ㆍ영광을 생명의 아들들인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이미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 없게 할 목적을 택하셨고, 그 목적을 따라서 오늘날 이 땅에 보내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고, 세례를 받게 하고, 그리스도의 것 되게 하시고, 성령으로 말씀을 믿게 하면서 우리 속에 그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그의 형상을 만들어 가심을 깨닫고 경험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자신들을 흠 없고 점 없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역사하시며 결국 순교 제물로까지 바쳐지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낳으실 때 우리에게 주려고 예비하신 하늘의 영광ㆍ기업을 고스란히 흰 옷을 입은 우리 즉 순교자들에게 주시니, 그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 영광이 첫째 부활의 영광이요, 순교자의 영광입니다. 순교는 방편이고 목적은 우리에게 하늘의 영광을 주셔서 영생복락케 하는 것입니다.
또한 흰 옷 입은 무리들이 ‘이 구원이 어린양에게 있도다’하고 찬양했습니다. 어린양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본질ㆍ본체가 하나이신 한 존재이시며 그분의 사역(일)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즉 세 인격자로 계십니다. 인격자를 ‘분’이라고 호칭합니다. ‘여러분’의 뜻을 한문(漢文) 투로 쓰는 말이 ‘제위’(諸位)라고 하는데 한자 ‘位’(위)는 ‘인격’, ‘존재’, ‘분’을 뜻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 인격입니다. 그런데 아들도, 성령도, 아버지도 모두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은 존재가 하나이시며 인격이 세 분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특수한 삼위일체의 특성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 존재에 한 인격입니다. 어린양은 제물과 관련됩니다. 어린양 예수님이 먼저 대속 제물로 죽으시고 흰 옷 입은 그들을 순교의 과정으로 인도하셔서 결국 순교의 제물이 되게 하신 것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나 성령은 영이시므로 육체를 입고 제물이 되실 수 없습니다. 오직 성자 하나님만이 말씀이신 영이 육신을 입으시고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로 성령을 통해서 주님을 구주로 믿게 하시고 성령 부으시어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주님과 하나로 연합된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순교당한 흰 옷을 입은 무리에게 성령을 한 번만 부어주신 것이 아니라 계속 부어주시되 일곱 영들로 충만케까지 부어주셨습니다. 그 일곱 영들로 그들을 순교시켰습니다. 순교는 누가 시키나요? 사도행전 6-7장에서 스테판 집사가 성령으로 계속 충만하면서 마지막 일곱 번째 하나님의 영광의 영으로 충만케 되어 순교했듯이 예수님이 부어주시는 일곱 영에 의해서 순교가 이루어집니다. 계시록상에서 순교하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일곱 영들에 의해서 순교하게 될 것을 계시하는 것이 계3:1, 4:5, 5:6에 일곱 영들이 나옵니다.
결국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은 예수님이 부어주신 일곱 영들에 의해서 순교가 된 것입니다. 순교를 통해 믿음의 승리가 이루어지고 이 구원ㆍ영광을 받게 됐으니 어린양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흰 옷을 입은 큰 무리가 이와 같은 구원의 내용을 실어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는 순교당한 자들이 이와 같은 것을 모두 경험했기에 순교당한 후 그 구원의 내용, 즉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하심과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확실히 깨닫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앞으로 흰 옷을 입은 큰 무리에 포함되어 이 같은 찬송을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릴 것을 미리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뜻을 정확히 모르면 흰 옷을 입은 큰 무리에 해당 될 수도 없을 것이고 순교도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계시록을 다루는 분들이 본문 말씀을 예비처 운운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거짓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흰 옷을 입은 무리가 서 있는 곳이 이 땅의 예비처라고 주장하면 이에 관련된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흰 옷을 입은 무리가 서 있는 곳이 보좌 앞이므로 그들은 이미 하늘나라에 간 상태임을 확증합니다.
11절) 또 그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 주위에 둘러선 모든 천사가 그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드리며 12절) 말하기를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세와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토록 있나이다. 아멘.” 하더라.
여기 11-12절은 우리가 앞으로 환란 날에 순교한 후 하늘나라에 가서 흰 옷을 입고 반드시 12절의 말씀과 똑같이 찬송할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12절의 찬송 중에 특징이 무엇인가요? “아멘”으로 시작해서 “아멘”으로 끝나는 것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아멘’은 계3:14에 예수님의 이름이라고 말씀했고, 동감ㆍ동의, 소원, 맹세, 의지 등의 의미가 ‘아멘’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늘 ‘아멘’이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이름이 지극히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하신 것 자체가 ‘아멘’입니다. 그러므로 흰 옷을 입은 무리가 예수님에 의해서, ‘아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승리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찬송입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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