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자신이 제단에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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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작성일 20-05-14 23:18본문
세 번째 사데 교회를 책망하시는 예수님을 보라!
3:1-2에서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하고 책망하셨다. 말씀을 살펴보면 모든 신앙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데 사데 교회는 생명에서 사망으로 전락하는 죽은 교회였다.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의 피로 교회가 생명을 얻었지만 로마 국교로 공인되자 교회가 생명에서 사망으로 전락되어 버렸던 중세 시대의 교회와 똑같다.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로 주님의 책망은 사랑을 담고 있다. 주님의 책망 속에 주님의 사랑이 들어있다. 그 사랑의 손길은 마지막의 주님의 사랑의 손길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는 이 말씀은 교회의 현재 상태의 모습이다.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고 했다. 남아있는 믿음으로 죽게 된 상태에서 회복하라는 말씀이다.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으니, 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 보일 만한 행위가 없는 신앙을 의미한다. 사데 교회는 죽은 신앙이었고 내보일만한 행함이 없는 죽은 신앙이었지만, 조금은 남아 있는 믿음으로 다시 살아나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사데 교회는 꺼져 가는 작은 불씨 같은 교회였다. 완전히 죽어버린 교회가 아니라 아주 작은 불씨가 남은 교회였다. 그 작은 불씨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그런 교회였다. 간신히 명색의 이름만 가지고 있는 그런 교회였다. 온전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죽은 교회였다. 그러나 아주 작은 믿음의 불씨가 사데 교회에 남아 있었다. 그 작은 믿음의 불씨는 사데 교회에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남은 몇 명이 있었다.
4절에 있는 흰옷 입은 몇 명이다. 중세 시대에 교회가 타락할 때 흰옷 입은 몇 명의 무리가 종교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회개를 촉구했다. 중세 시대에 카톨릭의 위세는 세상 쪽에서 볼 때는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왕들도 카톨릭 권세에 꼼짝을 못했다. 그러나 그 속은 이미 예수가 없는 죽은 교회였다. 지금까지도 카톨릭의 모습은 다를 바 없다. 구라파. 영국. 미국의 교회들이 사데 교회처럼 화려함을 자랑하고 예수를 잃어버리자 교회들은 죽은 교회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예화를 하나 한다면 과거의 영국은 100% 기독교 국가였다. 왕과 전 국민이 하나님을 섬겼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영국에서 나왔다. 웨스터민스터 교회는 찰스 황태자와 다니애나가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기도 하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교회이다 이러한 영국 교회가 죽어가고 있다. 챨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가 이혼했는데, 이혼 사유를 보면 챨스도 다이애나 비도 똑같이 혼 외 정사를 했다.
신앙이 땅에 떨어진 영국의 모습을 우리는 보았다. 다이애나 비는 이혼 후 프랑스에서 밀애를 즐기다가 밀애를 추적하는 카메라맨들을 피하여 자동차로 도망하다가 지하도에서 중간 기둥을 들이받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영국 기독교 신앙 끝을 보는 것 같다. 영국뿐인가? 미국 대통령 성추문 사건은 미국의 현실을 잘 대변해주는 사건이다.
대통령의 성추문 사건을 미국 국민들이 대부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이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 문제는 이제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기독교 신앙으로 세워진 미국이 이제는 아니다는 것을 본다. 영국. 미국. 구라파의 화려한 교회 속에는 이제 예수는 안 계신다. 그러나 그 타락 속에서도 아직까지 믿음을 지키고 있는 남은 자들이 있다. 그 남은 자들을 통해서 주님은 그 땅에 회개를 촉구하실 것이다.
우리나라도 다를 바 없다. 거대한 교회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밖에서 볼 때는 마치 거대한 힘을 자랑하고 있지만 과연 주님 보시기에 살아있는 교회일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는 아닌지? 마지막 때에 이러한 교회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우리나라도 건물 위주의 교회 상이 만연해지고 있다. 교회는 절대 건물 위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첫째도 예수요. 둘째도 예수요. 셋째도 예수다. 큰 교회에 예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가 너무 크다 보면 세상 방법과 수단이 들어오고 그런 수단과 방법으로 운영되는 교회에 과연 예수가 계시겠는가? 묻고 싶다. 마지막 때에 교회와 성도는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살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마 24:9)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하셨다. 또한 (요 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 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셨다.
마지막 때에 세상과 짝한 교회는 세상 속에서 권세를 누리며 그 위용을 세상에 나타내며 지낼 것이다. 우리는 초대 교회 때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느 주의 종은 역사는 수레바퀴와 같다는 말을 했다. 초림은 재림의 그림자다. 초대 교회 때 세상과 짝한 저 카톨릭의 권세가 어떠했는가? 초대 교회 때 믿음을 지키며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진 자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세상을 피해 지하 무덤 속에서 수 백년 지냈다.
그러한 초대 교회 같은 역사가 이 땅에 다시 한번 몰아 칠 것이다. 세상의 화려함, 세상의 권세. 명예 너무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예수 신앙이 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저 세상 것을 좋아하고 탐내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초대 교회 때 사도들과 성도들은 오직 예수 한 분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렸다. 하나 뿐인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렸다.
마지막 때에 주님은 남은 자의 신앙을 통해서 죽어가는 교회들을 성도들을 강하게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실 것이다. “주님이 너희에게 주신 그 믿음을 회복하라”“죄를 회개하고 예수께 돌아오라”고 촉구하실 것이다. 마지막에 책망이 될 것이고, 마지막의 회개 운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보더라도 사데 교회가 주님의 책망을 듣고 돌아왔느냐? 카톨릭이 종교 개혁자들의 책망을 듣고 돌아왔느냐? 영국이 미국이 돌아오고 있는가? 마지막 때에도 저들이 회개치 아니할 것이라고 계시록은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사데 교회에 소수의 흰옷 입은 무리가 있었던 것처럼 소수의 무리는 주께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가 마지막 때에 회개를 외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데 교회 성도들처럼 도시의 부와 풍요로움에 마음 뺏겨서는 안 된다. 책망을 받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책망을 받는 자리에 있다면 남은 작은 믿음을 붙잡고 다시 살아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 때 전능하신 주님만을 바라보시고 성령 충만으로 능력을 공급받아 두 증인과 같은 권세로 외쳐야 한다. 할렐루야! 마라나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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