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아가 강해(21) 아 3:3~5절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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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4-11-02 08:45본문
아가 강해(21) 아 3:3~5절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의 회복
지난 한 주간 더 깊은 영적 체험 안으로 신부들을 이끌어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하시려는 주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까? 첫 사랑을 잃었기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셨습니까? 첫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말씀 묵상과 기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혹여 순종치 못했을 때는 주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죄를 짓게 한 마귀를 심판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과 신부의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을 등한이 하고 주님께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하고 주님의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부르심에 핑계를 된다면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신부는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잃었기에 첫사랑을 회복하고자 예전같이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고 찾아도 발견치 못했습니다. 예전엔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으면 만났는데 지금은 찾아도 발견치 못하는 것입니다.
‘밤에 침상에서’란 친밀함의 장소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에 있을 때에는 기도와 말씀 묵상 만해도 주님의 임재를 경험했는데 이제는 예전과 같이 기도와 말씀 묵상을 하는데도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위해 한 단계 더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주님께 불순종한 결과는 예전의 친밀함을 얻기 위한 수단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부의 수준을 한 단계 더 올리시려는 주님의 작전이십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은 순종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기도도 많이 하고 말씀 묵상도 많이 하는 성도 중에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반대로 기도와 말씀 묵상을 하지 않는데도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경험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도 더 깊은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위해서는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잃은 신부는 예전에 익숙했던 방식에서 일어나 주님을 찾고자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거리에나 큰 길에서 주님을 찾으나 찾지 못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신부는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의 귀중함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결심을 하겠지요? “이제 내가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회복한다면 다시는 잃지 않을 거야!”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결심이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다윗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시 51:9~12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우리가 소중함을 안다는 것은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은 경험이 없다면 소중한 것이 소중한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신부는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잃은 후에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일했던 자리에서 일어나 낯선 환경인 성중에 돌아다니며 거리에나 큰 길에서 주님을 찾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 수많은 신자들이 과연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원인은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첫사랑, 주님과의 직접적인 만남, 왕의 침궁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거듭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여 주여’는 하지만 구원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과정이 있는데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행 2:38에,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3:19에,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행 11:18에,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눅 24:47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고후 7:10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달아 회개하므로 성령을 통해 죽었던 영이 살아났기에 구원받은 새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런 감격과 기쁨이 아직 없다면 죄사함을 받은 것도, 거듭난 것도, 구원받은 것도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았습니까?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셨습니까?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님을 통해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 거듭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받기 위해 회개하고 자신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므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님을 통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눅 5:31,3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므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님을 통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합니다. 지금 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까? 아니면 사라졌습니까?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습니까? 이런 분이 있으시다면 큰일입니다. 제발 개인적으로 제게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말씀해주시면 생명 바쳐서 복음을 가르쳐드림으로 성령으로 거듭나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술람미 여인도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그 원인은 불순종으로 인해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잃으면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잃고,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잃으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잃는 것입니다. 장성한 분량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작은 불순종에도 이 모든 것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죄, 작은 허물, 작은 흠이나 티까지도 제거하시므로 온전한 신부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십니다. 지금 이런 훈련과 연단을 받고 계신 성도가 있다면 헹가래를 쳐야합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지금 술람미 여인이 이런 축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축복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자발적으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찾아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이외로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3:3절에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 곧 이리저리 살피면서 돌아다니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같은 부류의 신부들입니다.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잃고 다시 회복하려고 성중에 이리저리 살피며 돌아다니는 신부들입니다.
이들에게 술람미 여인이 묻습니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그들도 못 찾고 헤매고 있는데 물으면 뭐합니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고 있지 않은 신부들에게는 물어봤자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이들에게서 떠나야합니다. 시간만 낭비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서 떠나야 답이 나옵니다. 답을 가지고 있는 여러 교회들 중에 저희 시온 교회에도 답을 가진 줄 믿습니다.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넘치는 시온교회에 방황하는 신부들이 모이게 될 줄 믿습니다.
아 3:4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답이 나오지 않는 방황하는 신부들에게서 떠나자마자 술람미 여인은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을 떠나자마자 만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은 어느 누구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첫 사랑 때 경험한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령세례의 필요성을 깨닫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거나, 복음을 들을 때나,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다시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누린다고 한다면, 예를 들자면 성도를 넘어뜨리거나, 입신을 시키거나, 웃게 하거나, 금가루가 떨어지게 하거나,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거나 등등 이런 일들이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누리는 증거가 된다면 미혹될 수 있습니다. 이건 마귀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계신 성령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악을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령 충만을 받았기에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고 그 결과로 성도를 넘어뜨리거나, 입신을 시키거나, 웃게 하거나, 금가루가 떨어지게 하거나,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해도 악을 버리지 않고 불법을 행하는 자가 이런 능력을 행한다고 그가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잘 분별하지 않으면 미혹되기 십상입니다.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각별히 조심하시고 미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술람미 여인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주님을 찾으려 할 때는 만나지 못하다가 “찾아도 소용이 없고 물어도 소용이 없구나” 했을 때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주님의 친밀함과 임재에 대한 다른 끈들을 다 놓았을 때, 비로소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났습니다. 사라졌던 주님이 어디에 계셨다고요? 자기 마음입니다. 결국 주님은 자기 마음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주님을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고 고백합니다. 이제는 결코 주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술람미 여인이 내 어미의 집으로 가기까지 주님을 놓지 않은 것은 주님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하시며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하심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때까지 주님을 놓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에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거듭났던 곳입니다. 바로 잃었던 첫사랑의 상태로 회복될 때까지 주님을 놓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첫사랑을 회복한 신부에게 다시 안식을 주시고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고 당부하십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 신자이기에 주님을 붙잡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때까지 주님을 놓지 않겠다는, 잃었던 첫사랑의 상태로 회복될 때까지 주님을 놓지 않겠다는 신부의 결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신부의 안식을 훼방할 수 있기에 주님이 깨우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시온의 신부 여러분! 이제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다른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그분을 찾아 만나셔서 꽉 붙잡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때까지, 잃었던 첫사랑의 상태로 회복될 때까지 주님을 놓지 않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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