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랍들의 거룩한 사역과 찬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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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4-12-28 08:09본문
스랍들의 거룩한 사역과 찬양 1.
사 6:1-4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내가 또 보았는데, 주께서 높게 들린 보좌에 앉으시고 그의 옷자락은 성전을 가득 채웠더라. 2 그 위에는 스랍들이 서 있어 각기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그 둘로는 그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둘로는 발을 가리며 둘로는 날았더라. 3 그리고 서로 소리쳐 말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온 땅이 그의 영광으로 충만하도다." 하였더라. 4 소리치는 자의 음성에 문의 기둥들이 흔들리고 그 집이 연기로 가득 찼더라”. 아멘.
애청자 여러분 오늘도 주님과 함께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 이사야서를 펼쳐 보았습니다. 잘 알다시피 이사야 6장은 이사야의 소명 장이라고 봅니다. 이사야선지가 웃시아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엎드려 기도드리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특히 웃시아 왕의 죽음은 많은 의미를 부여해 주는 죽음이라고 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살다가 의미 없이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웃시아 왕은 남쪽 유다 왕 중에 정치를 가장 잘한 지도자요 선한 왕이었다. 웃시아는 16세에 권좌에 올라 52년간을 장기 집권으로 나라를 다스려 왔습니다. 웃시아의 다른 이름은 ‘아사랴’ 입니다. 왕하 15:1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왕 제 이십칠년에 유다의 아마샤왕의 아들 아사랴가 치리하기 시작하였는데’ 2 그가 치리하기 시작하였을 때 십육 세였다는 말입니다.
웃시아 왕이 치리하고 있을 때 유다는 전성기 때의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대하 26장). 수로 공사를 해서 물 공급이 잘되게 해서 농사도 잘되고 군사력도 막강해졌습니다. 또한 기술공업도 발달시켜 왔습니다.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은 어려울 때보다 잘되고 강성해지다 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대하 26:16에 보면 “그가 강성하여지자 그의 마음이 멸망에까지 자고해졌으니, 이는 그가 주 그의 하나님을 거역하여 범죄하고 향단에 분향하려고 주의 전으로 들어갔음이더라”. 는 말씀입니다. 이때 아사랴를 비롯해서 제사장들이 앞을 가로막고 말려도 보았지만 아사랴는 권력으로 제사장들을 물리치고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고 할 그때 갑자기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서 온몸에 문둥병이 발생했다는 말입니다.
아사랴는 즉시 성전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왕이지만 왕궁에 거하지 못하고 별궁에 거하다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열왕의 묘실에 장사되지 못하고 다른 곳에 장사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잘될 때, 힘 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을 때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B.C.745-727년)이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근동 지방이 긴장에 휩싸이는 등 국제 정세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음을 봅니다. 이런 때에 선지자는 국가적 위기를 직감하고 성전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누가 위기에 처한 유다 나라를 구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유다가 굳게 설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깨달은 유다는 하나님의 도움만이 해결이라는 점을 깨닫고 성전에 올라가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누구든지 성도라면 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그러나 긍휼을 구하며 엎드려 기도하는 성도를 들어 쓰십니다. 기도하는 성도를 들어 역사하심을 봅니다. 성도들의 금보다 더 귀한 가치는 성전에 들어가 엎드려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성전에 들어가 두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는 시간이 많을수록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 엎드려 기도했을 때 영의 눈이 활짝 열렸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사 6:1절에서 <내가 본즉> 이 말은 <보았다는 것인데> 여기서 이사야는 영안이 열렸을 때 너무도 놀라운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내적인 영의 눈이 열리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세계, 계시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영안으로 바라본 그 세계는 놀라운 세계의 장면입니다. 그래서 사 6:1절에 <주께서 높게 들린 보좌에 앉으신 장면>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이 환상을 보여주신 뜻이 무엇일까요?. 당시 웃시야 왕은 죽었지만, 영원하신 왕 살아계신 여호와와 하나님께서 저 IS 유다 나라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영안으로 바라본 계시는 웃시야 왕은 죽었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IS 백성들 유다 백성들을 지키시고 위로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시 11:3-4에 “기초(터가)들이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4 주께서 그의 거룩한 성전에 계시며 주의 보좌가 하늘에 있으니, 그의 눈은 사람의 자손들을 보시고 그의 눈꺼풀은 그들을 감찰하시느니라”. 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주의 보좌가 하늘에 있고 그 보좌에 하나님이 앉으셨는데 다시 사 6:1절을 보면 주께서 높게 들린 보좌에 앉으시고 그의 "옷자락은 성전을 가득 채웠더라" 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우리 주님이 성전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은 이 시간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성전에도, 방송을 통하여 말씀을 받으며 예배에 동참하고 있는 이곳에도 하나님의 영은 임재하고 계십니다. 합 2:20에 ‘주께서는 그의 거룩한 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 잠잠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우리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셨습니다. 특별히 자리를 구분하고 성전에 오신 주님을 섬기고 예배드리는 자들, 성도들은 복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아멘.
선지자 이사야는 영의 눈이 열려있기 때문에 높게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채워진 모습을 보앗습니다. 경의로운 모습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도 진실한 신앙인으로서 영안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참된 신앙인이라면 세속에 묻혀 사는 것보다 영의 눈이 열려서 영계를 바라볼 수 있는 삶을 갖고 싶지 않나요? 우리들의 영의 눈이 하늘의 찬란한 광경, 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선지자 이사야가 바라본 영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면서 사 6:2~3절을 봉독합니다. ‘그 위에는 스랍들이 서 있어 각기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그 둘로는 그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둘로는 발을 가리며 둘로는 날았더라. 3 그리고 서로 소리쳐 말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온 땅이 그의 영광으로 충만하도다." 하였더라’. 아멘.
선지자 이사야가 영안이 열려 바라본 것은 스랍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모습들을 보앗다는 말입니다. 스랍들은 각기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그 둘로는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고, 또 둘로는 발을 가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둘로는 날았더라. 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소리치며 말하기를 3절에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며 창화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스랍들의 겸손한 모습에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각자의 모습은 어떠한지요? 예배드리는 각자의 자세, 태도는 어떠한지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스랍들의 모습에서 1. 각기 여섯 날개가 있는데 ‘그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는 것입니다. 여기 등장한 스랍들은 각기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고 있는 근위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스랍<사라프>은 불로 태운다. 소멸한다는 뜻인데, 또는 ‘불같은 자들’ 그런 뜻입니다. 이는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는 스랍들로서 성결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랍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를 호위하고 예배 때 수종 드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랍들이 각기 여섯 날개가 있는데 네 날개로는 얼굴과 발을 가리었고, 남은 두 날개로는 날아가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랍들은 각기 두 날개로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엄위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감히 볼 수 없는 피조물이란 점을 알았기에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운 것은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스랍들이 두 날개로 발을 가리었다고 했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 앞에 성결과 겸손을 나타내는 성스러운 모습이요 예배자의 바른 신앙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섯 날개 중 남은 두 날개로는 신속한 명령 수행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여기 등장한 스랍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충성을 다하여 수행하는 데 있어서 스랍들의 마음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열렬한 신앙심을 보여줍니다. 정열적인 뜨거움을 마음을 갖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스랍들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열정이 없는 신앙, 차가운 겨울을 만난 신앙인은 하나님 보좌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열정이 없는 신앙! 겨울을 만난 신앙으로는 안 됩니다. 미지근한 신앙은 다 사단이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사탄이 주는 훈장을 달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회복된 신앙으로 가슴이 뜨어워야 합니다. 기도가 뜨거워져야 합니다. 사랑이 뜨거운 불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눅 5:8에서 베드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는 성질이 급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들어 쓰셨습니다. 베드로가 디베랴 바다에서 밤을 새우며 고기를 잡아 보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바닷가에 나와 고물을 손질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저 깊은 데로 들어가서 고물을 던지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대로 순종하고 깊은 데로 들어가 고물을 던졌는데 고기가 고물에 가득하게 잡혔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배에까지 두 배에 가득히 채우는 만선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넙죽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은 감히 주님을 대면하여 바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욥 15:15-16을 보시면 “보라, 그 분은 그의 성도들을 신뢰하지 아니하시나니, 정녕, 하늘들도 그 분 보시기에는 깨끗하지 아니하거늘 16 죄악을 물처럼 마시는 사람은 얼마나 더 가증하고 추하겠느냐”? 고 했습니다. 스랍들도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었는데 하나님을 섬긴다는 인간이 얼굴을 가리우지 않고 자기 얼굴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얼굴 내밀기를 참 좋아하는 사람들! 맡은 일은 성의 없이 건성으로 하면서 자신의 명예를 철저히 챙기는 얌체족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명예욕 감투욕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는 필요가 없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명예 감투로 가지고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또는 그와 같은 자들은 쓰레기만도 못한 명예와 감투를 좋아하고 사람들 앞에 명예를 과시하고 자신을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현대판 바리세인들이 교회 안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은밀한 가운데서 다 보고 계십니다. 얼굴 없이 은밀하게 일하는 사람, 얼굴을 가리우고 겸손히 섬기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습니다. 아멘.
나와 여러분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스랍들처럼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었듯이 전능하신 하나님! 존귀하신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피조물인 우리가 얼굴을 가리우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가리었다는 것은 명예도 자신의 존재도 다 던져버리고 다 가리우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드리고 섬겨야 할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는 곧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요, 표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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