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아가 강해(20) 아 2:17~3:2 주님의 임재를 잃은 신부
페이지 정보
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4-10-25 10:15본문
아가 강해(20) 아 2:17~3:2
주님의 임재를 잃은 신부
지난 한 주간 주님이 원하시는 단계 곧 자아의 죽음을 통해 가나안에 들어가 마귀를 심판하는,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는 신부가 되는데 방해하는 작은 여우를 잡으며 잘 사셨습니까? 아니면 작은 여우를 발견하고 대적하기에는 두렵기도 하고 자신감도 없어 그저 주님께 작은 여우를 잡아 달라고 기도하면서 사셨습니까? 주일에 선포한 말씀같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가졌기에 마귀를 대적하면 이길 수 있는데도 아직 어린 믿음이라 차마 대적하지는 못하고 주님께 죄사함과 의롭다함만 얻는 성도도 있습니다.
지금 술람미 여인도 주님과의 친밀함을 방해하는 작은 여우를 발견했지만 어떤 환경과 상황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기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수준으로 자신을 이끄신 주님께 이 문제도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라는 서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자랑하고 있기에 일어나 함께 가자는 주님의 말씀에 아직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중에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심히 많은 가축 떼로 인해 요단을 건너가지 않고 야셀 땅과 길르앗 땅에 머문 것 같이 신부도 자기 만족에 빠져 광야에 머물 수 있습니다. 민 32:1~5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와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족장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가축에 적당한 곳이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17절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술람미 여인은 주님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고 간청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15절에서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주님께 부탁했었습니다.
곧 자신 안에 아직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음을 발견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기에 주님께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 했던 것입니다.그리고 다시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라고 간청합니다.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곧 주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작은 여우, 친밀함을 해치는 작은 여우의 문제, 자기 안에 있는 어두움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런 문제가 주님이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는 부르심에 거절의 사유가 될 수는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어떤 문제와도 상관없이 그저 주님께 “아멘”하고 달려가면 되는데 지금 자기만족과 변명에 빠져있는 모습입니다. 세상을 끊으라고 요구 앞에, 광야로 나아가라는 요구 앞에, 모든 말씀에 순종하라는 요구 앞에, 자아를 죽이라는 요구 앞에, 뒤돌아보지 말라는 요구 앞에, 망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술람미 여인은 “주여 아직 저는 이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재촉하지 마시고 제 상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소서!”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신부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중심적이 아닌 아직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남아 있음을 발견해야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은 주님과의 분리, 곧 주님과의 간격이 생기게 합니다. 베데르 산에서 베데르란 분리를 말하며 산은 장애물을 말합니다. 지금 술람미 여인의 장애물은 주님과의 친밀함과 순종을 방해하는 작은 여우이며 이 장애물이 주님과의 분리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베데르 산 곧 주님과의 분리를 초래하는 장애물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노루와 어린 사슴처럼 돌아와서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시고 신부는 아직은 일어날 준비가 안 되었으니 자기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 일의 결과를 보겠습니다. 아 3:1,2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3: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2장에서 주님은 사슴과 노루처럼 산을 달리고 언덕을 뛰어넘으면서 술람미 여인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셨는데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거절한 결과가 아 3:1절에 나온 것입니다. 예전에는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와 교제하는 기쁨이 있었는데 이제는 찾아도 발견치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왜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찾아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을 거절한 결과입니다. 아가 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주님은 술람미 여인에게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고 간청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순종하지 않은 결과를 맛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미숙한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깨뜨리고 성숙한 하나님중심적인 신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 수단을 통해 신부는 자아를 깨뜨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오직 ‘아멘’ 하는 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는 주님의 요청에 핑계를 대던 신부가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놓친 후에야 비로소 일어나게 됩니다. 사회복지사로 승승장구하며 더 큰 발전을 꾀하던 제가 지금 주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한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4년 전에 우연히 본 책들입니다.
제34대 통일부 장관과 중국대사관 대사를 역임한 김하중장로님의 ‘하나님의 대사’라는 책과 손기철 장로님의 ‘왕의 기도’라는 책입니다. 이 책들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분들이 겪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저의 첫사랑의 체험과 같았는데 저는 잃었고 그분들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까지도 나만큼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자만심으로 꽉 차 있었는데 이 책들을 통해 제가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4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며 매일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스바냐 1장 6절,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 주의 종이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했다면, 여호와를 찾고 구해도 자기 목적과 수단을 위해 찾고 구했다면, 주의 종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혹시 지금 이곳에 주님과의 첫 사랑을 잃어버린 성도가 있으시다면, 그래서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음성을 듣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제가 편하게 앉아 있던 자리, 신앙의 만족감의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주님께서 더 높은 자리를 알려주시고 마지막 때와 신부의 단계와 친밀함에 대한 계시와 마귀 심판에 대한 진리를 알려주시지 않았습니까?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신부의 여정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생명은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성장이 멈춘 생명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지 않는 성도는 다 죽은 것입니다. 떡으로만 사는 성도는 다 죽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6:53~5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인자의 살을 먹고 계십니까? 인자의 피를 마시고 계십니까?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여러분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성장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인자의 살과 피를 매일 먹고 마셔야하는 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영접하여 사랑하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혹여 순종하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면 인자의 피를 마시면 됩니다.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주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며 혹여 순종치 못하면 주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 성장하는 비결입니다. 지금 머문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원하신다면, 주님과의 친밀함을 다시 회복하시려면, 말씀으로 돌아가십시오! 주님과의 친밀함을 놓친 신부가 회복하기 위해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밤에 편안하고 익숙한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었고 나중에는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찾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디서 잃어버린 첫 사랑을 찾겠습니까?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신앙생활 초기 단계에서 느꼈던 감정을 찾아 은혜 받았던 기도원에 가시겠습니까? 유명 강사의 부흥회에 참석해야겠습니까? 아닙니다. 거리에서나 큰 길에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롬 10:6~8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첫 사랑을 잃었기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더 깊은 영적 체험 안으로 신부들을 이끌어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하시려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첫 사랑을 회복하시기 원합니까? 주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회복하시기 원합니까? 말씀 묵상과 기도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십시오! 혹여 순종치 못했을 때는 주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죄를 짓게 한 마귀를 심판하고 대적하십시오!
사랑하는 시온의 성도 여러분! 매일 말씀 묵상과 기도와 순종과 마귀를 심판하고 대적하는 것을 통해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시기를 나의 마음과 생명과 소망과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