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세이 봉지 커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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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4-11-28 10:01본문
봉지 커피 하나
게으른 하늘에 봄이 찾아오더니
올망졸망한 골목길 보드블록 틈에도
이름 모를 풀꽃들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는 아침
지나온 세월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폐지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골목길을 돌아나오던 할머니는
삶의 끝자락에
묻어오는 아픔이 있어서인지
언제나 쉬어가는 편의점 한 귀퉁이에
몸을 의지하고 앉았습니다
삐거덕거리는 몸뚱어리만큼
오래된 세월을 쓰다듬고만 있는 할머니에게 편의점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반기듯 문을 열더니
“할머니..
꽃샘추위라 아직도 추워요
얼른 들어오세요“
못이기는 척 따라나선
할머니에게 간이 의자를 내밀어 주더니 이내 봉지 커피 한잔을 타서 내밉니다
“아이고 ...
번번이 미안해서 이걸 어쩌누“
“할머니...
천천히 몸 녹이고 가세요”
봄 향기 같은 인사를 건넨 여자직원은
새벽에 배달된 물건들을 이리저리 진열하고 있었는데요
그렇게
오고 가는 계절처럼 할머니와 여자직원은 오래된 친구처럼
만나면 반가운 미소로 봉지 커피 하나에 실은 온기를 나누며 깊어져 가던 어느 날
때늦은 저녁인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할머니를 보며
“할머니께서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할머니의 두리번거리는 눈동자가
어느 자리에 멈추어 서는 걸 본
여자직원은
“할머니 미역국 드시고 싶어서
이 밤에 나오신 거구나”
“오늘 저 멀리서 우리 손자가
오는 날인 걸 내가 깜빡했지 뭐여“
“할머니... 잘됐네요
이거 내일 반품 하려 했는데
그냥 가져가세요“
낡아가는 세월에
주름 깊은 바람에 묻어 있는 아픔을
내보이고 싶지 않으셨는지
할머니는
흔들리지 않는 기억 하나를 매달고
바쁜 걸음으로 걸어나가시는 뒷모습을
애연하게 바라보던 여자직원은
얼마 뒤
주름 깊은 바람이 전해준
이야기하나를 듣고 말았는데요
“저 할머니..
엄마·아빠 없는 손자를 홀로 키우다
재작년에 교통사고로 그만 하늘나라로
갔다지 뭐야 아마 그날이 손자 제삿날이였나벼“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전해준 이야기를
가슴에 매달고 있었던 그 여자직원은
말하려 해도 입 다문 하늘처럼
서계시던 할머니가 오기만을 기다리다
공무원 시험 합격통지서를 받고
그만 지방으로 발령이 나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나가는
바람같은 날들만 흘려보내다
일 년이란 시간 앞에 멈춰선 어느 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들린 그 편의점 앞 할머니가 앉아계시던 그곳에는
비바람을 견디다 녹이 슬어 버린 주인 잃은 손수레가 벽을 향해 세워져 있었고
먼 데서 온 우리 손자에게
따뜻한 미역국을.먹여 보낼 수 있게 해줘서.고마웠다고 전해달라는 말과 함께 맡기고 간 봉지 커피 하나가
하늘거리는 봄바람을 견디며
쓸쓸히 놓여져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온기는
그대로 남겨 놓은 채로....
펴냄/노자규의 골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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