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세이 6월 첫째 주일「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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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5-06-01 06:45본문
“윤동주처럼, 이육사처럼”
저는 윤동주를 만나본 적도 없고 그에 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윤동주에 관한 책을 두루두루 읽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용정 명동촌, 그가 다니던 교회, 용정학교, 연희전문학교, 일본 후쿠오카 감옥, 릿쿄대학까지 다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윤동주 특강”까지 했고요. 그리고 ‘별빛 언덕 위에 쓴 이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 윤동주 시심이 들어오고, 제가 윤동주 시 속에 들어가서 시적 대화를 하며 차마 윤동주가 말하지 못한 내용을 시적 화자가 되어 ‘다시, 별 헤는 밤’이라는 시집을 썼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미안함이 들었냐면, 이육사 시인에게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육사 시인은 아주 강인한 성품을 지닌 실천적인 시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만 쓴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그의 막내딸 이옥비 여사에 의하면, 20년 동안 총 17번이나 수감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육사의 원래 본명은 이원록인데, 그가 처음으로 감옥에 갔을 때 수감번호가 264번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제에 저항하는 의미로 이름을 이육사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시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시를 쓰게 된 문학적 영감과 독립운동의 정신적 동기가 성경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딸 이옥비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중국어 성경을 늘 품고 다니며 틈틈이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 베이징 감옥에 수감 되어 견딜 수 없는 고문과 매를 맞다가 1944년 1월 16일, 40세의 나이로 순국을 합니다. 윤동주의 시가 개인적이고 보편적 인류의 가치를 읊었다면, 이육사는 그야말로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시의 지평이 더 넓고 웅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는 잔인하다 할 정도로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안한 마음에 몇 년 전에 안동에 있는 이육사 문학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를 다시 한번 보았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를 기록하거나 서술한 게 아니라 어떻게 자신의 애국적 혼을 시적으로 웅장하게 담아낼 수 있었는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광야’ 같은 시를 보면 그 광활한 시 세계에 경탄하게 됩니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山脈)들이 /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나리고 / 매화(梅花)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여라.”
그의 시는 원시적 광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 하늘이 열리고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광야는 바다로 향하는 산맥마저 차마 범하지 못하는 순결한 땅이었습니다. 그 위로 끊임없는 세월이 흐르고 사계가 흐르면서 드디어 역사의 강물이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 지금 눈이 내립니다. 그런데 겨울 광야에 매화가 필 수 없지만 매화 향기가 가득하다는 것은 그 어떤 폭압과 압제에도 굴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의 지조와 자신의 내면의 절개를 보여줍니다. 또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기독교의 메시야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에 대한 여망이야말로 조국의 독립과 광복의 축복을 염원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가 옥고를 치렀던 중국 북경 감옥도 한번 방문해 보고 싶습니다. 문학뿐만 아니라 목회도 그렇다고 봅니다. 때로는 윤동주처럼 따스하고 푸른 빛처럼 설교도 하고 사역도 해야 하지만, 때로는 이육사처럼 승부 근성을 갖고 장엄하고 또 잔인스러울 정도로 광폭적 공공 사역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윤동주처럼, 눈 내리는 겨울 광야를 백마 타고 달리는 이육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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