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박명륜 박사 칼럼 두 도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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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작성일 19-04-23 17:56본문
두 도시 이야기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더블린과 런던에서 화가가 되려고 수업하였으나 전향하여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 1887년 가족이 모두 런던으로 이사를 하였으며, 영국 잡지에 최초로 시를 발표했다. 예이츠는 환상적이고 시적인 <캐서린 백작부인>을 비롯하여 몇 편의 뛰어난 극작품을 발표했으며, 192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지난 2013년 6월 아내의 칠순기념으로 영국과 아일랜드를 여행하면서 ‘예이츠 박물관’을 방문했다.
예이츠가 60세에 쓴 詩 <비잔티움(Byzantium)으로의 항해>는 노인은 육체적으로는 낡은 옷처럼 보이나 정신적으로는 과거 찬란히 타올랐던 비잔티움의 문명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담고 있다. 예이츠는 시의 해설에서 “비잔티움 황제의 궁전에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있으며, 노래하는 인공의 새가 있다”고 했다. 그의 상상 속 비잔티움은 지적이고 화려한 환상과 마술이 교차하는 세계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4월 18일 오전에 열린 전원경 박사의 <미술사(美術史)> 강의 제목은 “두 도시 이야기: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플”였으며, 아내와 함께 두 시간 동안 흥미있게 수강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74-337)는 로마 제국을 다시 통일시킨 후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다. 그리고 밀라노 칙령(勅令)으로 기독교 신앙을 공인했다. 그는 기원전 7세기 그리스인들이 보스포루스 해협의 끝에 세운 식민지 비잔티온(라틴어 이름은 비잔티움)을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도시의 이름을 바꾸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예술을 이용했다. 황제의 절대적 권위, 초인간적 위대함과 신비 등을 나타내는 것이 비잔티움 예술의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이 목표를 당성하기 위해 예술 속에 등장하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 황제와 황후는 모두 같은 사람처럼 보이며 예수는 왕처럼, 마리아는 왕후처럼 묘사되었다.
비잔티움 건축의 꽃은 성 소피아 대성당(Cathedral of St. Sophia)이다. 서기 537년에 완공된 이 성당의 반구형(半球形)으로 된 지붕인 돔(dome)은 1천년 후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of St. Peter)이 지어질 때까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돔으로 군립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고대 로마의 기술과 공학 기법을 물려받았고, 이를 통해 성 소피아 대성당 같은 건축물을 축조할 수 있었다.
7세기 이후부터 동방의 이슬람 세력들은 끈질기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은 4차 십자군(十字軍)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십자군 침공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예전의 영광을 잃고 점차 쇠락하다 1453년에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에 무너졌다.
국립중앙박물관 후원못과 정원에는 봄꽃들로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특히 붉은미국산딸나무에는 붉은 꽃들이 만발하였다.
글/ 靑松 朴明潤 (Facebook, 19 Apri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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