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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성직자의 정치참여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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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작성일 20-08-2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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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성직자의 정치참여 어떻게 볼 것인가?

- 구약과 신약의 방식이 다르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믿고 기도해야

    

성직자의 정치참여 어떻게 볼 것인가?

특별칼럼 이흥선 교수.jpg

글 이흥선목사(총신대학교 평교;전문교육아카데미 교수, 개혁주의포럼 상임대표)

 

집단극화 현상과 양극화 현상

(集團劇化 現象, 兩極化 現像 )

 

 작금의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바라볼 때 그 어느 때 보다도 집단극화 현상’(集團 劇化 現象, group polarization. 애초의 의견이 집단적 논의를 통하면서 극단으로 강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집단 역학 때문에 쌍방 간의 극단적 대립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극심한 편견이나 증오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또 양극화현상(兩極化現像, 소득, 자산 등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어, 중산층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하위 계급이 중산층으로 계급 지위를 상승시킬 수 없게 되며, 빈곤층이 증가하게 되는 사회현상. )이 우리 사회에서 심화되고 있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다분히 정치적 성향을 띤 사회적 현상은 물론 이런 양극화 현상이 한국교회에도 심하게 분출되고 있다. 특히 성직자들이 정치에 관여하면서 양극화 현상은 간극이 넓혀지고 있다.

 

 이로 인해 교회와 교회간 또는 목회자와 목회자간, 성도와 성도간 반목과 분열이 가중되고 있다. 여기에 망국적인 포퓰리즘(Populism, 대중 인기 영합주의)까지 가세되어 공교회의 거룩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흥선 교수 칼럼.jpg

 

우리 한국 사회는 물론 한국교회까지도 세대 간의 깊은 갈등이 얽혀 있어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극심하다. 한국 전쟁 전후로는 경제적 가난 때문에 국가적 경제 성장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세대로 보수적 성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젊은 세대들 중심으로 한국 사회 부패의 장본인으로 보수 세대를 적폐로 치부하면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들을 위계 문화와 기성세대의 부패에서 찾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때문에 보수 세대에 대립하는 소위 진보적 성향을 띤 젊은 사람들과 보수와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교회 내에서도 표출되고 있다. 진보적 성향을 띤 젊은 세대들이 보수적 성향을 띤 목회자들과 대립하면서 교회의 반목이 커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국교회 내에서도 지연(地緣)적 이유나 자신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한국교회를 양극화의 수렁에 빠뜨리고 있는 상황이다.

 

교회내의 이런 현상은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함께 소위 태극기 집회(보수적 성향)와 촛불 집회(진보적 성향)로 나뉘면서 이런 양극화가 고스란히 교회에도 전이되어 교회의 분열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한국교회 분열은 우리나라 초창기 교리적 분열 이후 지금은 성직자의 명예욕, 물욕, 권세욕과 함께 정치적 편승이 첨가되면서 극도의 분열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매몰되고 있다.

 

구약에서의 선지자와 왕

필자는 본고를 쓰기 전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다. 왜냐하면 목회자들(또는 성도)마다 자신의 정치 참여에 대한 각기 나름대로 확고한 철학과 믿음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정치 참여에 대하여 과연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깊이 상고하였다. 그리고 성령님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본고는 일반 성도들보다 특히 목회자들에게 초첨을 맞춰 쓰여진 글임을 참고 바란다.

 

성도들 개개인의 정치 참여는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얼마든지 정치 참여가 가능하고 자기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자신만의 정치적 견해를 갖거나 표현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민주적 방식의 하나인 선거를 통하여 자신의 권리를 펼 수 있다. 필자는 성도들의 정치 참여를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에게도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만 정치 참여가 가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목회자들의 타당성 이유를 들어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왕에게 바른 말을 직고하거나 죄를 지적하였음을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해야만 한다.

 

구약은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들을 다스리지 않고 죄를 짓고 타락할 때 하나님이 세운 종(선지자)을 왕에게 보내 경고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곧 구원 받은 성도 안에서의 일임을 예표한다. 하나님의 종들이 왕된 성도(벧전2:9)에게 경고하여 바로 잡아준 의미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신약의 예표요 모델이고 약속이다.

 

하지만 신약의 세상 왕들(세속 정권)은 사탄의 권세 안에 있는 자들(2:8)이기에 하나님은 이들에게 교훈이나 경고를 주기 위해 자기의 종들을 보내시지 않는다.

 

구약성경에서 나단 선지자가 살인죄와 간음죄를 지은 다윗 왕을 찾아가 왕의 죄를 지적한 일이 있다(삼하12:1-14). 나단의 질책을 받으면서도 다윗 왕은 바로 회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단 선지자는 왕의 따귀를 때린다든지 등의 물리력을 일체 가하지 아니하였다. 선지자는 자신의 입에 넣어준 하나님의 예언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할 뿐이었다. 이것이 왕을 대하는 구약의 종(선지자)의 방식이었다.

 

신약에서의 목회자와 왕(권세자)

 

예수님은 사랑과 섬김을 강조하신다..jpg

    

구약의 방식과 신약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 전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세상 왕들(대통령, 지배자)에게는 선지자(목자=목사)를 보내지 않는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예언을 받은 것만 전하였다. 이 예언에 자기의 생각을 첨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약은 그런 예언을 주의 종들에게 주시기 않는다.

 

그렇다면 왕(권세자, 대통령 등)이 잘못할 때 목회자나 성도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물어본다면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은 율법아래에 있기 때문에 용서를 수용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무한정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6:14,15; 18:21 11:25 6:37; 11:4 고후2:10 4:32).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5:43,44). 최고의 적은 원수(사람)이다. 성경에서는 이 원수를 내 힘으로 갚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원수를 직접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면 하나님이 친히 갚으신다고 말씀하셨다(12:19 10:30). 그러면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2:14)” 오히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12:20)”고 말씀하셨다.

 

사도바울은 롬 12장과 15장까지 성도의 신앙생활, 사회생활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면상 간략하게 설명 드린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13:1,2).

 

성도는 권세 잡은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셨다. ‘각 사람은이란 단어와 복종하라는 말은 누구든 예외가 없다는 말이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설령, 불신자인 왕(대통령)도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 사상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왕권신수설은 성경적이 아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은 비단 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가 기관에 다양한 형태의 위 권세들을 포함한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제도와 왕(권세자, 대통령 등)을 존대하라고 말씀하셨다(벧전2:13-17).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적으로 다스리시는 동시에 세속 정부인 국가를 통해서도 우리를 통치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다. 세상 정권도 하나님의 소명이며, 하나님 앞에서 합당할 뿐 아니라 세상 집권자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므로 그들을 배척하면 사실상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삼상8:7).

 

집권자들의 형태가 다양하다 할지라도 권세는 한결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13:1), 심지어 일인 독재로 군림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권세이다(8:15; 24:21 벧전2:17). 통치자도 하나님의 일꾼이다(13:4,6).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주께서 세우신 자들에게(13:4) 공손히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다(13:2,5,7). 권세자의 사적인 불법까지 수용하라는 말은 아니다. 범법을 일삼는 권세자는 법 규정 안에서 처벌될 수 있으며, 국민도 법 안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누구이든 간에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고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에 내는 조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13:6.7). 악을 행하는 자가 통치자를 두려워하지만 선을 행하는 자는 통치자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칭찬을 받는다(13:3).

 

그리고 집권자, 즉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대리로서 그 직무에 충실해야 하며, 모든 정성과 열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와 선과 후의와 공의를 나타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대리로 봉사한다는 각성 하에, 과오를 범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을 섬기지 않고 오만하여 악한 권세자로 행세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12:19 10:30).

 

권세자를 위한 성도의 태도

그렇다면 왕(권세자, 대통령 등)이 악한 행동을 할 때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도에게는 최고의 특권이요 무기가 기도이다. 오직 권세의 근본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만 성도에게 주어졌다. 직접적인 물리력 행사는 허락되지 않는다(위에서 언급한 성경 구절들을 참고하기 바람). 내가 하나님 되려고 하면 안 된다.

 

권세자들이 악한 자가 되어 백성들을 괴롭히고 악행을 저지를 때 성도는 기도만 하면 된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가 합당하면 응답하셔서 악한 권세자를 심판하신다. 기도는 의식적 형식이 아니다. 실제이다.

 

인간의 힘으로 국가를 바꾸고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국가의 흥망성쇠,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의 투쟁 방식에 그리스도인들이 동참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간 갈등이 격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정점으로 소위 태극기 부대와 촛불 세력이 맞대결 하고 있다.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집회 현장에서는 폭력이나 과격한 언행들이 난무한다. 특히, 소위 애국집회에는 일부 목사들이 앞장서 집회를 이끌고 있다. 목사나 연사들의 발언 수준을 보면 저급한 속어가 주를 이루고 대통령을 향한 육두문자는 시장 잡배들을 연상케 한다. 촛불 세력의 언행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성경을 외면하는 악행이다.

 

목회자나 성도들은 이런 집회 참여를 자제해야 한다. 이런 곳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가? 오히려 악령의 역사만이 가득할 뿐이다. 집회에서 예수님의 용서와 인자를 찾아볼 수 없다. 상대에 대한 배려나 겸손과 사랑이 존재하는가? 오히려 상대에 대한 비난, 비판, 미움, 이간, 판단, 정죄, 혈기, 분쟁, 원수 맺음, 당 지음, 분열, 싸움의 영들만 가득한 현장일 뿐이다.

 

이같은 일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악한 불신자들의 행동에 동조하는 것이다(5:19-21). 이런 집회에 참석하면 할수록 위의 열거한 악한 영들만 충만하게 받아온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한다.

 

왜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손의 물리력으로 무언가를 쟁취하려 하는가?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 능력되신 삼위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도해도 하나님은 응답하실 수 없는 분, 이루실 수 없는 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곧 믿음 없음이다. 이것을 형식적 믿음, 형식적 기도라고 말한다.

 

소위 애국집회에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한다. 현 정권이 좌파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공산화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공산주의를 왜 싫어하는가? 독재를 하기 때문 아닌가? 자칭 보수 세력들에게 묻고 싶다. 현 정권을 뺏아서 보수 세력이 10,20년 계속 정권을 가졌으면 할 것이다. 이 생각 자체가 공산주의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한두 번은 특정 정당(세력)이 집권하고, 그 다음은 야당이 한두 번 하고 서로 바꿔가면서 집권할 때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그나마 바람직한 정치가 되리라 판단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태도를 견지하여 투표권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데모 성격의 집회가 아닌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표출할 수 있는 장치가 선거제도이다. 표를 통해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을 만들 수 있다.

 

한 국가가 공산화 되거나 주변의 대국을 통하여 식민통치를 받게 되는 것도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날 때 주변 대국의 노예가 되어 종살이를 하였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징계요 심판의 영역이다. 인간의 힘으로 이루거나 막을 수 없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2:1-3).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온라인) 예배와 교회의 대응

2019년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가 세계적 팬데믹 현상과 함께 우리는 Post-Corona 시대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With-corona로 흘러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현 상황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대면의 언택트(untact=noncontac) 시대를 맞고 있다.

 

교회마다 비대면(온라인 영상) 예배가 확대되고 있다. 코로나19가 급격한 확산세를 보이자 방역당국은 강력한 대면 예배를 금지하고 교회들의 협조를 당부했다. 그런데 일부 교회들이 헌법에서 정한 결사의 자유, 신앙의 자유 등을 침해하는 종교 탄압이라며 대면 예배를 강행하는 등 정부나 방역당국과 심한 마찰을 빚고 있다.

 

타종교와의 형평성 원칙에 반하는 행정명령이라는 오해 소지도 있지만 교회도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에 정부의 방역행정에 교회가 적극 협조하는 것은 당연하며 성경적이다.

 

일부 특정 교회에서는 바이러스 테러라고 주장하면서 어이없는 가짜소문을 퍼뜨리면서(십계명 중 제9계명 위반) 방역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급속하게 확산되고 거리두기 2단계로 격상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이들 목회자들의 행동은 신천지보다 더 악한 일이다.

 

잘못된 특정 목회자 한 두 사람 때문에 한국교회의 고통은 물론, 나라 전체가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국민 모두에게 심한 고통을 가중시킨 일에는 이들 목회자를 동조하면서 참여한 일부 국민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일정부분 방역당국의 책임도 있겠으나 이런 시국에는 누구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온 국민 모두가 협력하여 이 코로나 정국을 빨리 타개해 벗어나야만 한다.

 

비대면 예배의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교회들도 다수가 있다. 하지만 대면예배나 비대면 예배나 공히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신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도 하나님은 들으시고 함께 하신다(18:20). 지나치게 대면예배만을 반드시 고집하는 것은 안식일적 예배 방식이다. 신약의 영적 예배는 장소를 초월한다(4:20-24). 그렇다고 대면예배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국가의 제도와 행정에 순응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이웃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이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이 절실해진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4:6).

 

예수님은 사랑과 섬김을 강조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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