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라 목사는 몽사가(夢思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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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작성일 20-12-28 18:13본문
서사라 목사는 몽사가(夢思家)인가?
권호덕 교수(콜부루게연구소장, 조직신학)
·권호덕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과(B.A.)·신대원(M div.ep.)
얼마 전에 지인의 소개로 ‘성도 티비’(SungDo TV)라는 유튜브를 시청한 적 있다. 필자는 이 여자 목사(성도님)가 서사라 목사를 몽사가인 것처럼 일방적으로 비판 아니 비방하는 것을 보고 이런 행위가 합당한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그녀의 발언은 신학적으로 타당성을 지니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자기가 지닌 비판기준으로 상대방을 몰아세우는 것 같았다.
필자가 서사라 목사를 알게 된 것은 2019년초로 기억된다. 총신대원 선배이고 고교 후배 목사 한 분이 서목사의 서적을 읽어볼 것을 권고했다. 필자는 즉시 신청하여 그 당시 7권의 저서를 구입하여 두세 주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읽었다. 성경은 지옥과 천국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는 제공해 주지 않는다. 아마 바벨탑 사건과 더불어 더욱 파괴된 인간의 언어로서는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기엔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리고 성경에서 우선 급한 일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을 받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이전에 재임시 종말론을 강의하면서 기존 가르침에는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주제에 관심이 쏠린 것으로 여겨진다. 마라나다 정신이 미흡하고 현실중심적인 경향이 농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뉴톤 시대의 그에 방불한 스웨덴 과학자인 스웨덴보리가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고 저술한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과 미국 하바드 의과대학 교수이던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가 쓴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도 읽어보았다.
그리고 지옥과 천국에 대해 간증하는 여러 유튜브도 들어보았다. 서목사의 간증수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은 대부분은 본 것을 기행문식으로 열거하지만 서목사는 천국에 있는 주님과 믿음의 선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묻고 대답하는 것이다.
한번은 필자의 거주지 근방에서 서목사의 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는 살짝 참석하며 설교를 들은 적 있다. 서목사의 관심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하여 천국에 들어갈 준비하는 일에 있었음을 감지했다. 저녁 집회는 참석하지 못하고 지인 한 분이 참석한다길래 나중에 내용을 전해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집회에는 인(印)침을 받는 집회가 있었다. 필자는 그 지인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했다.
필자는 듣고 매우 놀랐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참 회개한 하나님의 백성들 이마에 십자가를 그린다는 것이다. 그 장면은 에스겔서 9:3-4에 기록된 내용과 너무나 같았다. “겔 9: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요한계시록 7장은 이마에 인을 친다는 말만 한다. 그런데 서목사가 본 이마의 인은 십자가였다. 그런데 성경은 이 인을 ‘십자가’라고 하는가? 필자는 2012년 초여름 구약학자이던 고(故) 최의원 박사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일을 기억했다. 한국 최초로 히브리 원어에서 순수 우리말로 구약성경(새즈믄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한 최박사는 이 구절을 언급하면서 구약에서 유일하게 십자가가 나오는 구절이라고 하시며 자기는 “곱셈 표시”(✕)로 번역했다고 한다. 최박사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싫어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감추었다고 말했다.
사실 에스겔서 9:4의 ‘이마에 표하라’는 것의 히브리 원문에는 ‘이마에 타우(ת)를 그리라’이다. 필자는 여러 가지 번역 성경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은 ‘이마에 표하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독일어권의 유명한 성경인 ‘츄리숴 비벨’(Züriche Bibel)에는 ‘십자가를 그리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 다음 필자는 여러 가지 주석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 카일과 델리취는 이 표를 십자가라(cross)고 지적한다. 카일과 델리취는 본문의 타우(ת)가 히브리어 알파베트 맨 나중 글자임을 지적하면서 히브리어 더 초기 문헌에서는 ‘십자가 형태’(×)를 가졌다고 한다. 현대 주석가인 Block도 본문의 타우(ת)가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임을 지적하며 고대 문서에는 Χ 형태 또는 십자가 형태를 취했음과 아람어로부터 문자를 채용하기까지는 초기에는 이 형태를 취했음을 주장했다.
필자는 문득 독일 유학시절 히브리어를 배울 때 사용한 문법책이 생각났다. 그 당시 독일 대부분 신학교에서는 독일의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 예니(Ernst Jenni)가 저술한 문법책을 사용했다. 예니는 독일 구약주석가 베스터만(Claus Westermann)과 함께 두 권으로 된 구약히브리어 사전까지 저술한 바 있다. 예니의 히브리어 문법책은 먼저 히브리어가 어떻게 발전해 나왔는지를 설명하면서 문자 발전사 도표를 제시했다.
첫째 단계는 페니키아어 알파벳, 둘째 단계는 옛 히브리어 알파벳, 셋째 단계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히브리 성경(BHS)의 알파벳이 표시되어 있었다. 필자는 에스겔시대의 문자는 둘째 단계임을 파악하고 둘째 단계 알파벳의 맨 끝자인 타우를 찾으니 ×였다. 에스겔은 그 당시에 ‘이마에 타우(ת)를 그리라’고 한 것이 ‘십자가를 그리라’고 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의원 박사와 츄리숴 비벨은 잘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카일 델리춰와 블록(Blook)의 주석은 옳은 것이다. 나는 매우 놀랐다. 2,5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예언이 하나의 상징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지금도 지금 이런 집회에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의 이마에 인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보고 있다. “계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만일 그렇다면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 주의 오심을 맞이하기 위해 긴박하게 준비해야 되는 시기가 아닌가?
필자는 서 목사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어서 궁금하던 여러 가지 문제를 물었다. 특히 유체이탈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서 목사는 유체이탈은 두 번 경험했고 대부분 몸은 땅에 있으면서 하늘 세계를 본다는 것이다. 그녀의 저서는 그녀의 인격적 주체는 땅에 있는데 그녀의 영적인 실체가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녀의 영이 하늘로 올라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신비한 사건으로 보인다. 필자는 성경에서 이런 경험을 한 선지자들이나 사도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 있으면서 예루살렘을 오간 기록이나 사도요한이 하늘 세계를 보며 장소를 이동하는 것과 유사한 것인가? 그렇다면 에스겔의 영적 실체의 움직임이나 사도요한의 이런 장소이동은 신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구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서목사가 단순한 夢想家(몽상가)가 아니라 깊은 영적인 체험을 곧 물리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체험을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무모한 비판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그녀는 성경에 충실하고 경건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서 목사가 66권 성경 이외의 성경을 쓴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저서를 읽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서목사는 성경을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녀 나름대로 영적인 체험을 통해 난해구절을 해석하려고 시도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서목사가 내어 놓은 이런 새로운 해석들은 신학적인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학회나 포럼이 필요한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서목사를 비판한 글들을 읽어보았는데, 더러는 매우 좁은 비판 기준으로 가치없는 비난 수준의 글도 볼 수 있었고 더러는 나름대로 한국교회를 위하여 비판하는 글도 있었다. 필자는 포럼 주관자들에게 이들로 하여금 다음 포럼에서 발표하고 신중한 논쟁이 있으면 신학 발전을 위해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비판가들이 서목사의 발언을 비판하기 위해 해당 구절을 주석하는 내용에는 전문가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 사람의 신학은 그 사람의 믿음의 조종을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비판할 때는 그 사람의 믿음이 바른가를 살펴야 한다. 진보적 신학이든 보수신학이든 믿음이 바르다면 결국 그의 신학은 건전한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경건한 믿음은 바른 신학으로 인도한다는 말이다.
사실 서목사의 저서에는 기존 신학의 시각으로 볼 때는 당황케 하는 내용도 많이 나온다. 그런 내용들은 신학적인 고찰과 비판을 요할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신학자들이 그 동안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파악하게 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비판할 것이 있다면 서목사의 발언을 매우 세심하고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에 비판한다면 실수를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성도티비’의 여목사가 비판하는 자세는 천로역정의 아볼리온을 생각나게 했다. 그녀의 쏟아놓는 발언에는 자신만이 심판자로서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오만함도 엿보였다. 이런 사람이 신학자를 함부로 비판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런 사람의 사고의 근원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필자의 눈에 비친 서 목사는 깊은 영적인 체험을 한, 경건한 한 사람의 전도자로 보였다.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의 천국지옥 간증은 몽상가가 아닌 전도자로서 큰 역할을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권호덕 교수 약력
· 총신대학교 신학과(B.A.)·신대원(M div.ep.)
· 독일 뭔스터대학교 신학석사(Mag. theol.)
·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박사(Dr. theol.)
· 현, 콜부르게학파 연구소 소장
· 백석대 조직신학 교수 역임(정년퇴임)
· 한국 개혁신학회 회장역임
· 독일 뭔스터 장로교회 개척 및 목회
· 성산교회(합동측) 담임목사 역임
· 서사라 목사 천년왕국설에 대한 비판적 고찰 등 다수, 신학논문 70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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