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윤 칼럼(23-25)> 대구 출신 천재화가 이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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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3-04-12 20:38본문
<박명윤 칼럼(23-25)> 대구 출신 천재화가 이인성
천재화가 이인성(李仁成)은 1912년 8월 28일 대구에서 출생했다. 이인성은 대구시 산격동에서 활동하면서 화가의 꿈을 키워 나갔다. 이에 이인성을 기리는 <이인성 사과나무 거리(LEE IN SUNG Apple Tree Street)>가 산격동에 조성되어 이인성의 작품들이 벽화로 재현되어 대구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과(apple)는 필자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에는 대구가 특산지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강당에서 열리고 있는 인문학 연구강좌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 100년> 제3강좌(4월 11일 오후 2-4시)에서 정하윤 박사(이화여대)는 천재화가 이인성과 구본웅, 오지호 등 3명의 생애와 작품에 관하여 설명했다. 박물관 정원 연못에는 수련(睡蓮)이 자라고 있었다.
이인성은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처음 입선한 뒤로 1936년까지 천부적 재능과 신선한 표현감각을 발휘한 수채화와 유화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여, 천재적인 화가로서 각광을 받았다. 약관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혜성처럼 나타난 아소(我笑) 이인성은 1932년 전일본수채화회전을 비롯하여 1933-35년의 제국미술원전(약칭 제전), 1938년의 문부성미술전(약칭 문전), 1933-34년의 광풍회전에서 잇달아 입선하였다. 이인성은 1930년대 ‘조선의 지보(至寶)’, ‘양화계의 거벽(巨擘)’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이인성은 20대 중반의 청년기에 타고난 재능을 최대로 발휘했으며, 유럽의 근대 회화 사조인 인상파·후기 인상파·야수파·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법으로 재치 있게 소화하고 자유롭게 활용하였다. 그의 불투명 수채화의 극히 과감한 표현 처리와 특출한 기량 발휘는 근대 한국 미술사에서 특히 높이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채화의 본질적 묘미와 높은 차원의 표현성이 그로부터 처음 보인 것이다.
근래에 미술평론가들이 ‘한국근대유화베스트10’에 1위로 선정한 <경주의 산곡에서>(1935)를 비롯하여 <가을 어느날>(1932), <복숭아>(1939), <해당화>(1944) 등 불후의 명작들과 근대화단에서 가장 뛰어난 수채화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카이유>(1932), <아리랑 고개>(1934), <여름 실내에서>(1934) 등 정물화, 풍경화 외에도 작가 자신을 그린 몇 점의 <자화상> 등 인물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와 기법을 보여준다.
1945년부터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미술학과에 강사로 나갔다. 1947년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948년에는 국화회(國畵會) 회화연구소를 개설하여 수채화와 유화를 지도하고,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졌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추천 작가로 서양화부 심사위원에 선임되었다. 애석하게도 1950년 11월 4일 비운의 총기 오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오지호(吳之湖, 1905-1982)는 전남 화순에서 구한말 보성군수를 지낸 오재영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직후 나라 잃은 통한에 비분강개하며 자결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강경한 성품과 남다른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어린 시절 이름은 점수(占壽)였고, 동복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전주고보에 진학했다가 서울의 휘문고보로 편입하면서 신문화와 신미술에 눈을 떴다. 휘문고보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화를 배우고 돌아온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 미술교사로 있었다.
오지호는 1925년 화가수업을 위해 일본에 건너가 기초과정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거쳐 1926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당시 도쿄미술학교는 일본적인 아카데미즘을 표방하던 교육기관으로 오지호는 후지시마 다케시의 가르침을 받았다. 1931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김주경 등과 젊은 미술가들의 모임인 ‘녹향회’의 동인이 되어 사실적 자연주의 기법의 유화를 발표했다. 1938년에는 컬러로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을 발간했다.
오지호는 1935년부터 개성 송도고보의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송악산 아래 김주경이 남겨 준 초가는 그가 1944년까지 살았던 집으로 그의 대표작인 <남향집>이 바로 그 집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화창한 봄날의 따뜻한 기운을 쏟아지는 빛과 보라색 그림자로 표현했다. ‘그늘에도 빛이 있다’고 생각한 오지호는 ‘그늘은 빛에 가려진 것이 아니라 빛이 변화된 것’이라고 보았다.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문을 나서는 어린 소녀와 담장 아래에서 봄볕을 받으여 졸고 있는 삽살개가 정겨운 감흥을 일으키는 작품이다.
오지호는 8.15광복 직후 1948년부터 광주에 정착하여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후학을 가르쳤고 호남지역 미술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6.25전쟁 중에는 작품이 불에 타 없어지는 고통을 겪었으며,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원색의 작품을 선보였다. 오지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및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73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 대한민국 예술원상(1977)을 수상했으며, 1982년 12월 25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지호기념관>이 전남 화순군에 1998년 개관했다.
한국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인 오지호의 주요 작품에는 나부(1928), 아내의 상(1936), 사과밭(1937), 도원풍경(1937), 남향집(1939), 가을풍경(1953), 열대어(1964), 항구(1967), 무등산(1969), 만추(1969), 과수원 풍경(1972), 함부르크 풍경(1974), 선운사 설경(1979), 가을풍경(1981) 등이 있다. 저서로는 오지호 작품집(1978), 미술평론집 현대회화의 근본문제(1968), 알파벳 문명의 종언(1979), 미학원론 미와 회화의 과학(1992) 등을 남겼다.
구본웅(西山 具本雄, 1906-1952)은 1906년 3월 7일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출판사인 창문사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기업인 구자혁이다. 어머니가 구본웅을 낳고 일찍 사망한 뒤 2살 무렵, 돌보는 사람의 실수로 척추를 심하게 다쳐서 평생을 등이 굽은 꼽추로 살았다. 신명학교, 경신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경신고보 재학 중에 미술에 입문하여 고려미술회의 고희동(高羲東)에게서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배웠다.
이후 고려미술원에서 조각가 김복진에게 사사하여 조각을 배운 뒤 화가이면서도 조각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신체가 불편한 구본웅에게 조소는 쉬운 분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1년 조각 부문에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얼굴 습작>으로 특선으로 입상했으며,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뒤 1928년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했다.
일본에서는 1928년 가와바타미술학교를 거쳐 1929년 니혼대학에서는 미술이론을 수학하고, 1933년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하는 등 다채로운 교육을 받았다. 귀국한 이듬해 1934년에 서양화가 단체인 목일회, 1935년 백만회 등의 진취적인 성향의 미술단체 창립에 참여했고 미술비평활동을 전개했다.
구본웅의 화풍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나, 색채가 강렬하고 붓질이 거칠어 야수파 계열로 분류된다. 대표작으로 여성의 신체를 과장되게 묘사한 여인(1940), 초등학교 동창인 작가 이상(李箱, 1910-1937 )을 그린 우인상(친구의 초상, 1935) 등이 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미군정청 편수국에서 미술과목 편수사로 활동했으며,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언론계에 종사하였다. 1952년 2월 2일 서울 누하동 자택에서 급성 폐렴(肺炎)으로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 (1) 이인성: <자화상>과 <가을 어느 날>,
<박명윤 칼럼(23-25)> 대구 출신 천재화가 이인성
천재화가 이인성(李仁成)은 1912년 8월 28일 대구에서 출생했다. 이인성은 대구시 산격동에서 활동하면서 화가의 꿈을 키워 나갔다. 이에 이인성을 기리는 <이인성 사과나무 거리(LEE IN SUNG Apple Tree Street)>가 산격동에 조성되어 이인성의 작품들이 벽화로 재현되어 대구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과(apple)는 필자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에는 대구가 특산지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강당에서 열리고 있는 인문학 연구강좌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 100년> 제3강좌(4월 11일 오후 2-4시)에서 정하윤 박사(이화여대)는 천재화가 이인성과 구본웅, 오지호 등 3명의 생애와 작품에 관하여 설명했다. 박물관 정원 연못에는 수련(睡蓮)이 자라고 있었다.
이인성은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처음 입선한 뒤로 1936년까지 천부적 재능과 신선한 표현감각을 발휘한 수채화와 유화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여, 천재적인 화가로서 각광을 받았다. 약관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혜성처럼 나타난 아소(我笑) 이인성은 1932년 전일본수채화회전을 비롯하여 1933-35년의 제국미술원전(약칭 제전), 1938년의 문부성미술전(약칭 문전), 1933-34년의 광풍회전에서 잇달아 입선하였다. 이인성은 1930년대 ‘조선의 지보(至寶)’, ‘양화계의 거벽(巨擘)’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이인성은 20대 중반의 청년기에 타고난 재능을 최대로 발휘했으며, 유럽의 근대 회화 사조인 인상파·후기 인상파·야수파·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법으로 재치 있게 소화하고 자유롭게 활용하였다. 그의 불투명 수채화의 극히 과감한 표현 처리와 특출한 기량 발휘는 근대 한국 미술사에서 특히 높이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채화의 본질적 묘미와 높은 차원의 표현성이 그로부터 처음 보인 것이다.
근래에 미술평론가들이 ‘한국근대유화베스트10’에 1위로 선정한 <경주의 산곡에서>(1935)를 비롯하여 <가을 어느날>(1932), <복숭아>(1939), <해당화>(1944) 등 불후의 명작들과 근대화단에서 가장 뛰어난 수채화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카이유>(1932), <아리랑 고개>(1934), <여름 실내에서>(1934) 등 정물화, 풍경화 외에도 작가 자신을 그린 몇 점의 <자화상> 등 인물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와 기법을 보여준다.
1945년부터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미술학과에 강사로 나갔다. 1947년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948년에는 국화회(國畵會) 회화연구소를 개설하여 수채화와 유화를 지도하고,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졌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추천 작가로 서양화부 심사위원에 선임되었다. 애석하게도 1950년 11월 4일 비운의 총기 오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오지호(吳之湖, 1905-1982)는 전남 화순에서 구한말 보성군수를 지낸 오재영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직후 나라 잃은 통한에 비분강개하며 자결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강경한 성품과 남다른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어린 시절 이름은 점수(占壽)였고, 동복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전주고보에 진학했다가 서울의 휘문고보로 편입하면서 신문화와 신미술에 눈을 떴다. 휘문고보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화를 배우고 돌아온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 미술교사로 있었다.
오지호는 1925년 화가수업을 위해 일본에 건너가 기초과정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거쳐 1926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당시 도쿄미술학교는 일본적인 아카데미즘을 표방하던 교육기관으로 오지호는 후지시마 다케시의 가르침을 받았다. 1931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김주경 등과 젊은 미술가들의 모임인 ‘녹향회’의 동인이 되어 사실적 자연주의 기법의 유화를 발표했다. 1938년에는 컬러로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을 발간했다.
오지호는 1935년부터 개성 송도고보의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송악산 아래 김주경이 남겨 준 초가는 그가 1944년까지 살았던 집으로 그의 대표작인 <남향집>이 바로 그 집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화창한 봄날의 따뜻한 기운을 쏟아지는 빛과 보라색 그림자로 표현했다. ‘그늘에도 빛이 있다’고 생각한 오지호는 ‘그늘은 빛에 가려진 것이 아니라 빛이 변화된 것’이라고 보았다.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문을 나서는 어린 소녀와 담장 아래에서 봄볕을 받으여 졸고 있는 삽살개가 정겨운 감흥을 일으키는 작품이다.
오지호는 8.15광복 직후 1948년부터 광주에 정착하여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후학을 가르쳤고 호남지역 미술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6.25전쟁 중에는 작품이 불에 타 없어지는 고통을 겪었으며,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원색의 작품을 선보였다. 오지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및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73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 대한민국 예술원상(1977)을 수상했으며, 1982년 12월 25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지호기념관>이 전남 화순군에 1998년 개관했다.
한국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인 오지호의 주요 작품에는 나부(1928), 아내의 상(1936), 사과밭(1937), 도원풍경(1937), 남향집(1939), 가을풍경(1953), 열대어(1964), 항구(1967), 무등산(1969), 만추(1969), 과수원 풍경(1972), 함부르크 풍경(1974), 선운사 설경(1979), 가을풍경(1981) 등이 있다. 저서로는 오지호 작품집(1978), 미술평론집 현대회화의 근본문제(1968), 알파벳 문명의 종언(1979), 미학원론 미와 회화의 과학(1992) 등을 남겼다.
구본웅(西山 具本雄, 1906-1952)은 1906년 3월 7일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출판사인 창문사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기업인 구자혁이다. 어머니가 구본웅을 낳고 일찍 사망한 뒤 2살 무렵, 돌보는 사람의 실수로 척추를 심하게 다쳐서 평생을 등이 굽은 꼽추로 살았다. 신명학교, 경신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경신고보 재학 중에 미술에 입문하여 고려미술회의 고희동(高羲東)에게서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배웠다.
이후 고려미술원에서 조각가 김복진에게 사사하여 조각을 배운 뒤 화가이면서도 조각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신체가 불편한 구본웅에게 조소는 쉬운 분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1년 조각 부문에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얼굴 습작>으로 특선으로 입상했으며,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뒤 1928년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했다.
일본에서는 1928년 가와바타미술학교를 거쳐 1929년 니혼대학에서는 미술이론을 수학하고, 1933년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하는 등 다채로운 교육을 받았다. 귀국한 이듬해 1934년에 서양화가 단체인 목일회, 1935년 백만회 등의 진취적인 성향의 미술단체 창립에 참여했고 미술비평활동을 전개했다.
구본웅의 화풍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나, 색채가 강렬하고 붓질이 거칠어 야수파 계열로 분류된다. 대표작으로 여성의 신체를 과장되게 묘사한 여인(1940), 초등학교 동창인 작가 이상(李箱, 1910-1937 )을 그린 우인상(친구의 초상, 1935) 등이 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미군정청 편수국에서 미술과목 편수사로 활동했으며,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언론계에 종사하였다. 1952년 2월 2일 서울 누하동 자택에서 급성 폐렴(肺炎)으로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 (1) 이인성: <자화상>과 <가을 어느 날>,
▲ (2) 오지호: <남향집>,
▲ (3) 구본웅: <친구(이상)의 초상>,
▲ (4) 박물관 연못.
사진 제공 靑松 朴明潤 (서울대 保健學博士會 고문, AsiaN 논설위원), Facebook, 12 April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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