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보름스(Worms)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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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6-02-26 23:09본문
독일 보름스(Worms)를 다녀와서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발자취

◀박성덕 변호사[법무법인 민주]
본인이 섬기는 교회에서는 남선교회주관으로 매년 상반기 약 12주, 하반기 약 10주 정도, 매주 화요일 오전 6시 30분터 7시경까지 담임목사님께서 주제를 정하시어 조찬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데 ,많을 경우에는 회원 300여명, 적을 때에는 약 200여명이 참석하여 조찬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본인은 약 30여년간 화요조찬성경공부에 참석하여 목사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제목의 성경강의를 들었는 데, 2025년에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루터의 생애와 그 발자취에 대하여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루터는 1483년 독일 중부에 있는 작은 도시인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고,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1505년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을 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입회한 후 그 곳에서 수도사직을 수행하였습니다. 그후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 학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성경 연구에 몰두하다가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말씀을 통하여 당시 교황청이 발행하는 면죄부 관행의 신학적 오류와 도덕적 문제점등을 지적하고자 1517 년 그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반포하고,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교황권에 대한 비판,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 강조등)’ 이라는 등의 주요 저술을 하게 되자 그것은 그 당시 유럽세계를 지배하던 천주교 및 교황청에게 예상치 못한 엄청난 파문을 가저왔고, 그 후 루터가 교황청 및 고위 성직자들과의 여러차레 공개 토론과 논쟁을 벌이자 교황 레오(Leo) 10세는 루터가 지상의 거대한 권력에 도전을 한다는 이유로 들어 루터를 파문한다는 교서를 반포하였으나 ,그 교서를 받아 본 루터는 이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교황청은 당시 독일을 통치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 5세(karl V)에게 루터를 파문하라는 통지문을 보내자, 카를 5세는 독일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독일 시민을 정당한 재판없이는 파문이나 처형할 수 없고 교황의 명령에 무조건 따를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해결하고자 루터의 파문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521. 4 .17부터 4. 18 까지 독일 보름스(Worms)에서 제국회의(Diet of Worms)를 개최하기로 하였고, 그 제국회의에 7인의 선제후(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사람, 쾰른 대주교 등 3인 대주교, 작센공 프리드리히 3세를 비롯한 제후 4명)를 소집하였습니다.
보름스 제국회의에 참석하여 재판을 받으라는 카를 5세의 소환장을 받은 루터는 자신이 정정 당당함을 선제후들에게 피력하기 위하여 보름스 제국회의에 참석하려고 하였으나 그를 아끼는 여러 선후배들은 거기를 가면 분명히 처형을 받을 터인데 가지 말라고 간청을 하였으나 루터는 나는 정당함을 밝히고 싶고 “나의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이시고 힘이시니 환난 중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니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비텐베르크를 출발하여 여러 날을 거처서 보름스로 갔습니다.

1521. 4. 17 보름스 대성당에서 카를 5세를 비롯한 7인의 선제후는 루터에게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을 비롯한 여러 저서가 너의 저서냐, 그 저서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철회할 용의가 있느냐”라고 심문하자 루터는 “ 위 책들에는 교황권의 남용등에 대한 것인데 이는 성경의 취지와는 절대 어긋나고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고,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속박당하였으니 하나님께서 도와 주신다,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설득되지 않는 한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다”라고 하자,1521. 4. 25 카를 5세를 비롯한 선제후 7명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라고 하면서 앞으로 ‘루터는 이단자이자 제국의 범법자다,루터를 발견하면 처형해도 좋다, 루터의 저작물을 금지하고 파문한다’는 결정을 하였습니다.(보름스칙령, Edict of Worms)
루터는 파문되었지만 카를 5세는 루터를 처형하지 않았고,루터에 대하여 호의적이던 작센공(프리드리히 3세)은 루터를 그의 관할내에 있는 바르트부르크(Wartbrug) 성으로 은신하게 하여 그 곳에 머물게 하였는데 , 루터는 그 곳에 머물면서 라틴어 성경를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본인은 2025년도 상반기에 화요조찬 성경공부를 할 즈음 루터의 생애와 그 종교개혁지를 공부하면서 기회가 닿으면 루터가 머물고 다녔던 곳을 방문하여 보리라 생각하던 차 둘째 아들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한국 기업 주재원으로 가 있어서 아들, 며느리, 손자도 만나보고 ,루터의 종교개혁지를 방문하려고 2025. 10 초순경 아내와 함께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둘째 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등현지 여러 곳을 두루 살펴 보았습니다.
본인과 아내는 2025. 10. 15. 오전 9시경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을 출발하여 기차로 약 1시간 남쪽에 있는 보름스 중앙역에 10시경 도착하였습니다. 네비게이션을 따라 도로로 약 15분정도 걸어가자 루터 광장이 보였고 그곳에 루터 기념비(Lutherdenkmal)가 우뚝 서 있었습니다. 기념비는 1868년 에른스트 리츨(Ernst Rietschel)외 여러 조각가가 청동 및 석재로 제작한 것으로서 세계 최대 규모의 종교개혁 기념비로 루터와 종교개혁의 핵심인물들을 한 눈에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적물이었습니다.

기념비의 정중앙에 루터의 동상이 있는 데, 성경을 왼손에 들고 굳게 서 있었는 데 이는 교황이나 황제보다 성경의 권위와 그의 신앙적 양심을 표현하고 있었고, 그 주위에 필립 멜란히톤( 루터의 신학적 동반자), 요한 후스( 체코 프라하 출신으로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선고를 받은 순교자)),프리드리히 3세( 작센공으로서 루터를 보호하여 종교개혁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한 인물)등 여러 인물들이 함께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종교개혁이 한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진 한 것이 아니라 신앙, 정치, 사상 ,문화가 연합하여 이루어진 운동이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루터 기념비를 지나 약 5분정도 걸어가보니 그곳에 보름스 대성당(Worms Dom)이 있었는데 그 곳은 당시 제국회의가 열렸던 역사적인 공간으로서 카를 5세를 비롯한 선제후 7명등이 루터를 심문한 장소였는 데, 심문하는 모습을 그린 ‘ 보름스 제국회의의 루터”라는 그림의 사본이 걸려 있었는 바, 그 그림에서 루터의 당당함(교황권보다는 성경말씀이 중요하다는 신앙을 강조함)을 엿 볼 수 있었고, 대성당 옆에 있는 공원에는 그 당시 루터가 신었다는 신발 조각물 및 조형물도 있었고, 2021년 Worms 500주년을 기념하는 Luther 초상화도 있어서 감회가 매우 깊었습니다.

15세기 유럽, 교황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그 시기에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 오직 은총으로(Sola Gratia),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e) 라는 기치하에 신앙의 최종 권위는 교황이나 전통이 아니라 오직 성경이라는 하면서 교회개혁을 위하여 목슴도 아끼지 않은 마르틴 루터의 신앙에 대하여 고개를 깊이 숙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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