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없는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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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챤포토저널 댓글 0건 작성일 24-07-14 21:58본문
날개 없는 천사
날개 없는 천사
“할머니….
콩나물 천 원어치만 주세요“ 중학생인 손자랑 단둘이 살며 시장에서 야채 행상을 하는 할머니에게 얼마 전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데요 장사를 마칠 때쯤 정리를 하다 보면 어느 날은 소세지가 든 비닐봉지가 또 어느 날은 참치가 든 비닐봉지가 좌판 밑에 놓여 있는 걸 본 할머니는 오지 않는 주인만 기다리다 맞은 비 오는 어느 날 오후
“할머니 시금치 한 단만 주세요“ "당근 천 원어치만 주세요" 사람들이 북적이다 간 그날도 누군가 또 놓고 간 나물 반찬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할머니는 바쁜 와중이라 그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던 끝에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는데요
9일 소세지 15일 참치캔 24일 새우튀김 29일 어묵 수첩에 적어 나가던 글자들이 빼곡히 늘어만 가고 있을 때 “어이쿠…. 누가 우산을 놓고 갔네 그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는 우산 주인 대신 그 우산으로 첫눈처럼 튕겨오르는 빗방울들을 피해 집으로 온 할머니는 다음 날 햇살이 거리를 뽀송하게 말려놓은 아침을 걸어 나와서는 거리에 나뒹구는 박스 하나를 주워다 놓고는 [소세지, 참치 캔, 새우 튀김, 어묵 검정 우산을 놓고 가신 분 찾아가세요] 라고 적은 박스를 턱 하니 내밀어 놓고 계셨지만 한 달이란 시간이 흘러도 찾아갈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밤새 곰곰히 생각만 하다 잠들어 있던 하늘을 깨우고 나온 할머니는 온 종일 손님 하나 든 적 없는 노점에 앉아 손자와 눈물로 익혀온 세월을 담은 마음 첩만 헤아리다 집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요 “이건 또 뭐야?“ 검정비닐 안에 소금에 잘 절인 고등어 두 덩어리가 들어가 있는 걸 집으로 가져와서는 잠들기 전 수첩에 고등어 한 마리를 채워넣고 계셨습니다.
눈물과 아픔을 남겨 두는 법 밖에 모르던 할머니는 다시 볼 수 없는 가을을 바라보듯 자꾸만 늘어나는 수첩 속 글자들을 보며 또 다른 근심만 늘어나던 것도 모자라 오늘은 계란 한 바구니까지 놓여 있는 걸 보고는 할머니의 궁금증은 늘어만 가고 있었는데요 “할머니…. 요즘 친구들이 도시락 반찬 맛있다며 다들 내 옆에 와서 먹는다고들 난리야….“ 가난에 절어 커버린 손자가 좋아하는 반찬 하나 못 만들어 준 미안함보다 남의 것을 이렇게 먹어도 되나 싶은 걱정 반으로 창공에 섬이 된 거 같은 할머니와는 달리 신이 난 손자는 점심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와…. 동수 너 요즘 도시락 반찬이 나날이 발전하는데??“ “이 어묵 먹어봐…. 맛나지?“ 짝지인 경호까지 덩달아 신이나서는 “어쩐 일이야.?”“ ”나도 몰라.. 요즘 우리 할머니가 신식 할머니가 되셨나 봐“ 맨날 짠지에 김치만 싸 오던 친구의 도시락을 보며 핀잔만 줬던 게 미안해서인지 집으로 온 경호는 밤에 떠오른 해님을 본 것처럼 “엄마…. 할머니랑 사는 내 짝지 동수 있잖아 요즘 도시락에 맛난 거 많이 사 와서 좋아 “
“어 그래….” “동수는 요즘 도시락 먹는 행복으로 학교에 오는 것 같아“ “그렇구나 ” “나도 덕분에 입이 호강하는 중이야.” “잘 됐구나 서로서로 나눠 먹고“ 세상 살기 좋은 바람이 불어온 것처럼 그동안 도시락에 얽힌 이야기를 엄마에게 밤새 펼쳐놓던 경호가 다음 날 학교가 갔을 때 파란 하늘에 구름이 멈춰버린 것 같이 근심 어린 눈동자로 앉아만 있는 동수를 보고는 “동수야 너 왜 그래? 그동안 신나 있었잖아“ “사실은 도시락 반찬 말야”
행복이라는 이자를 받은 듯 들떠 있던 동수가 그동안 땡볕에 그을린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는데요 “난 그것도 모르고 맛있다고 먹기만 했지, 뭐야“ "나두.“ "그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이제껏 먹은 거 다 내놓으라면 어쩌지 우리 할머니 돈 없는데….“ 주워 담고 싶었던 이야기를 흐느끼듯 하는 동수에게 “우리 오늘부터 탐정이 되어보는 건 어때?”
그렇게 마스크와 망원경까지 준비한 탐정 놀이는 동수 할머니가 일하는 시장부터 시작되고 있었는데요 “오늘은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토요일이니까 범인이 분명 나타날 거야“ “오늘부터 잠복근무야….” 세월을 이고 앉은 동수 할머니가 잘 보이는 맞은편 건물에 숨어 물건을 놓고 가는 사람이 누군지 반드시 찾겠다는 마음으로 망원경을 눈에 대고 이곳저곳을 살피던 그때 “경호야…. 누가 우리 할머니 쪽으로 접근하고 있어…. 누군지 망원경으로 잘 봐봐.“
“알았어! 걱정 마.” “어어…. 경호야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놓고 할머니가 주신 콩나물만 들고 가는 것 같애“ 동호가 말하는 소리를 한쪽 귀로 들으며 망원경을 뚫을 듯 바라보던 경호의 입에서 “어어…. 저 저….” “왜 그래 누군지 똑똑히 봤어?” 경호는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지우고는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엄마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날개 없는 천사를 보았습니다 라고….
펴냄/ 노자규의 골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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